티스토리 뷰


Note:  미생 백기른 기반 다수 커플 등장.

PC 혹은 Soundcloud 지원 환경에서 BGM과 감상하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모바일에서는 재생 버튼을 한 번만 눌러주세요.)



신체건강한 대기업 엘리트 사원 장백기 (살다보니 게이)

20대 끝자락에서 연애 생활 마감을 선언하다.


    


   Fashionably 

        Invited 




#1 꿈결처럼 다가와 마법처럼 사라진




회색 재규어 XJ가 한 대 지나간다. 나는 버릇처럼 유심히 그 안을 살핀다. 술기운 때문인지 평소보다 노골적으로 차에 가까이 다가섰다. 기대하는 것은 고급 정장차림의 남자. 새카맣게 썬팅된 차는 내가 운전석을 노려보는 2~3초 안에 부드럽게 미끄러지며 시야에서 사라진다. 시발, 존나 빠르네. 멍하니 혼자남은 나는 황당한 얼굴로 차 뒤꽁무니를 쫓는다. 심란하게 왜 저런 고급차가 왜 우리 동네에 나타나갖구……. 지금은 행방조차 묘연한, 잘생긴 흰 얼굴에 미소가 얹어지는 장면을 떠올린 내가 주정뱅이처럼 불분명한 발음으로 중얼거렸다.



위로주라고 들이킨 술보다 주인공의 푸념과 다른 녀석들의 질타가 제 3자인 나를 괴롭히는 새카만 새벽이었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모 대기업에 입사해 만 3년을 채운 녀석은 석 달 전 직장을 때려쳤다. 짐을 챙겨나온 날 의기양양한 얼굴로 신규 앱 개발 사업을 준비 중이라며 우리에게 맥주를 샀더랬다. 그렇게 홀가분해보였던 그는 오늘밤 온데간데없었다. 돈과 사람을 모두 잃은 패배자 하나만 동기들 앞에서 아이처럼 목 놓아 울었을 뿐이다.


‘꿈에도 몰랐어. 개만도 못한 놈. 내가 저를 얼마나 가족 같이 여겼는데. 걘 대체 날 뭐로 생각한 걸까? 자본은 없어도 사람 잘 만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내가 돈도 다 대고…. 대체 왜 그랬을까? 난 걜 정말 철석같이 믿었단 말이야…….’


동업자이자 기술 개발을 책임졌던 놈이 투자자본과 사업 내용이 담긴 데이터를 들고 중국으로 튀었단다. 아직 공식적으로 회사를 설립하기 전이라 사업 아이템 유출과 횡령을 증명할 문서화된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고 했다. 소주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얘기를 듣고 있던 (인문대 출신으로 똑같이 기술의 ㄱ자도 모르는) 동기들은 공분하면서도 멍청한 놈이라며 한 마디씩 했지만 나는 쉽사리 그를 욕하지 못했다. 


범인을 잡지 못할 거란 걸 경험적으로 직감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나는 5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습관적으로 재규어를 보면 그 안에 있을 지도 모르는 이를 쫓았지만, 한번도 찾는 얼굴을 발견한 적은 없었다. 그래도 잘 해결될 거라는 위로를 건넸다. 어쩌면 피해자의 잘못은 사람을 너무 믿은 것 밖에 없었다. 그 언젠가의 나처럼.




# 1st Invitee: Mr. Cheon




회색 재규어 XJ와 브리오니 수트는 천관웅의 상징이었다. 


인생에서 연애라고 부를만한 관계를 처음 시작한 건 스물 둘. 제대 후 학교에 돌아오니 동기들은 죄다 군대에 있거나 휴학을 해서 신입생 때처럼 재미있지가 않았다. 군대에서는 총천연색으로 회상되곤 했던 대학생활은 그렇게 파릇파릇하고 상큼하지도 않았다. 만날 애인도 없는 캠퍼스 생활에 나는 그저 꾸준히 과외를 하며 통장 잔고만 쌓아갔다. 그러다 교내 성소수자 모임을 찾았다. 괜찮은 사람이 있나 싶어 들어왔지만 내 타입은 없었다. 대신 우린 1차로 종로에서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다가 이태원에 가서 함께 술을 마셨다. 그 모임에서 나는 처음으로 게이클럽에 발을 들이게 됐다. 그마저도 하룻밤 유희 상대를 찾으러 온 남자들이 많다는 걸 깨닫고 나자 흥이 식던 차였다. 옆에 남자를 하나씩 끼고 춤을 추거나 술을 마시기 바쁜 동행들을 두고 클럽에서 빠져나왔다.


여름밤의 후텁지근함과 습기보다 끈끈하게 들러붙는 시선에 갈증이 일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죄다 술집뿐이었다. 조금 걷다가 검은 간판을 달고 있는 지하의 바로 내려갔다. 조용한 재즈가 나오는 테이블 한쪽에 혼자 앉아 이름도 잘 모르는 칵테일을 테스팅 하듯 시키고 음료수처럼 들이켰다. 실내에는 쳇 베이커(Chet Baker)의 목소리가 울렸고, I've Never Been in Love Before가 끝나면서 세 번째 잔을 비웠다. 


‘난 한 번도 사랑에 빠져본 적이 없었죠. 방금 당신에게 한눈에 반했어요. 계속 내 사랑은 당신일 거예요. 전엔 한 번도 사랑해본 적이 없어서 내 맘이 안전한 줄 알았죠. 내 승률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건 와인 같아요. 너무 신기하고 강렬하기만 한 걸요….’ 


피, 좋겠다…. 모쏠이었어도 결국 만난 거잖아. 가사를 곱씹다가 더 외로워졌다. 자리에서 일어서 계산을 마치고 올라가던 때, 누군가 나를 불렀다. 급하게 달려나왔는지 남자의 검은 정장 자켓 밑자락이 펄럭였다. 저기요, 하는 저음의 목소리에 멈춰서는 발끝이 조금 떨렸던 것 같기도 하고.


  “실례라면 한 대 때리고 지나치셔도 됩니다. 그치만 제가 잘못 짚은 게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예?”

  “손님이 맘에 들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

  “들어오실 때부터 봤는데 오늘 놓치면 못 뵐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요.”


잘 빠진 정장을 입은 키 큰 남자가 수줍게 웃었다. 흔한 헌팅 멘트였지만 어른스러움이 묻어나는 선한 얼굴과 남자다운 골격에 두근거렸다. 할래? 나가자, 허리에 손을 대고 귀부터 핥아대는 클럽 남자들과는 달랐다. 앞에 선 남자는 매너가 좋았다. 결국 목적은 같을지 모른다는 의심이 살짝 고개를 들었지만 몸도 외롭던 차였으므로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상대의 몸은 늘 꿈꾸던 이상형 그대로였다. 계산을 마친 나는 그 얼굴을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천관웅과 나의 첫 만남이었다.


첫 연애라는 상징성에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인지 나는 거의 500일에 걸쳐 천관웅에게 빠져들었다. 천천히 명함을 건네고 내 허락을 구한 남자가 술을 먹이는 대신 24시간 카페로 데려간 순간부터 반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뒤에 알게 된 나보다 8살이나 많다는 사실은 그의 깔끔하고 어른스러운 느낌이나 몸에 밴 매너로 너무도 쉽게 상쇄됐다. 몸에 둘러진 고급스러운 물건들이나 항상 나를 태우고 다니던 외제차의 영향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내겐 조금 부담스럽지만, 이태원에서 레스토랑과 와인바를 운영하는 사람에게는 퍽 잘 어울리는 취향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솔직히 나는 그 모든 것들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동기들과 함께 가는 건 꿈도 못 꿀 레스토랑에 앉아 식사를 하면서 눈을 반짝이면 웃으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것도, 남자가 처음이라는 말에 부드럽게 달래며 리드하던 것도, 시험기간엔 피곤할 거라면서 굳이 차를 끌고 데리러 오는 것도, 기념일마다 넘치는 선물로 나를 감동시키는 것까지…. 신데렐라도 아니고 이런 변화는 놀라운 것이었다. 내게 천관웅은 동화 속 왕자님, 프린스 차밍이나 다름없었다. 프린스라기엔 나이가 좀 많았지만―. 


통속극에나 나올 법한 연애가 이어지는 동안 나는 점점 더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한시라도 더 그의 귀여움과 애정 섞인 눈빛을 받고 싶어 어쩔 줄을 몰랐다. 한 해 동안 열심히 준비한 교환학생에 선발되었을 때에도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프랑스인데 가 있는 6개월 간 나를 잊지는 않을까 싶어 죄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결국 기숙사 신청이 잘 되었단 확인메일을 받고 눈물을 보이는 내 앞에서 관웅은 안정감 있는 목소리로 나를 위로했다.


  “백기야, 하고 싶었던 일이잖아. 난 프랑스에서 더 많은 경험을 하고 온 백기를 더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


서른이 되면 저렇게 어른스러워질 수 있는 걸까. 새삼 감탄하며 나는 눈앞의 연인 얼굴에 입을 맞췄다. 내가 당신에게 한 번 더 반했다는 소리였다. 그는 인터넷만 연결되면 국내통화처럼 쓸 수 있다는 인터넷 전화를 챙겨주며 자신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의 행복까지 빌어주었다. 


그땐 정말 그런 줄로만 알았다. 정말로.





프랑스에 도착해 첫 일주일은 적응하기도 바빴다. 현지인들의 여유로운 일처리 덕분에 기숙사에 들어온 지 일주일이 다 되어서야 인터넷 연결을 할 수 있었다. 통화를 하며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다던 내 말에 그는 시차로 인해 졸린 목소리를 하면서도 두어 시간에 걸친 내 투정을 받아주었다. 첫 한 달은 이틀에 한 번 꼴로 통화를 했다. 학교 일로 내가 바빠지자 그 간격이 사흘에 한 번으로 늘어났고, 그의 사업이 바빠지면서 일주일에 한 번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가끔 시간을 잘못 맞춰 가게가 문을 닫기 전에 전화를 하면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어떤 의심도 하지 않았다. 본래 바(Bar)라는 것이 그런 장소였으므로. 


그러다 점점 서둘러 전화를 끊는 기색에 덜컥 걱정부터 했다. 뭐가 잘 안 풀리나? 그런 날은 괜히 속상해 현지인 친구들과 부어라 마셔라 파티를 하고 클럽도 다녔다. 이전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탈은 어느 정도 반발 심리에 기인하고 있었다. 내 기억만큼 다정하지도, 나를 그리워하지도 않는 관웅에 대한 불만을 그런 식으로 해소하려 했던 것이다. 기어코 귀국을 한 달쯤 남겼을 땐 상대의 목소리에선 애정보다는 조급함이 더 많이 섞였다는 걸 눈치 챘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일주일에 한 번쯤 통화를 했고 사랑한다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급한 목소리로 돈을 빌려달라는 전화를 받은 건, 2주간의 마지막 유럽여행 일정을 남겨두고 있을 때였다.


  “백기야, 형이 힘든 얘길 해야 할 것 같아.” 


너 귀국일도 얼마 안 남았는데 미안하다. 어딘지 꽉 막힌 기운에 물기가 서려있는 목소리는 처음이어서 무척이나 당혹스러웠다. 


  “형, 무슨 일이에요? 괜찮아요? 얘기 해봐요.”

  “내가 아무리 그래도 아직 학생인 너한테 이런 부탁하는 게 아니라는 건 아는데…….”

  

아니다, 끊을게. 몇 번이고 망설이던 그 목소리에 나는 다급해져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면 뭐든 해볼게요. 왜 그러는 건지 얘기해줘요.”


관웅이 깊게 한숨을 쉬었다. 일이 잘 안 풀릴 때면 그는 관자놀이를 짚어내다가 위스키를 마셨다. 크리스탈 술잔을 앞에 놓고 플래티넘 커플링을 낀 굵은 손으로 잔을 더듬고 있을 관웅이 눈앞에 그려졌다. 아니나 다를까, 희미한 목 넘김이 들리고 난 뒤 가라앉은 목소리가 넘어왔다.


  “백기야. 주형이가 가게를 담보로 보증을 섰어. 당장 가게를 넘기게 생긴 상황이라 급하게 융통할 자금이 필요해.”

  “아….”

  “일단 오피스텔 보증금 빼고 내 차며 가게 가구부터 급하게 팔아넘겼는데 이 새끼가 얼마나 크게 빚을 진 건지 아직도 1억 정도가 비어.”


하…. 눈앞이 캄캄해져 나는 그 한숨 밖에 뱉어내지 못했다. 이주형은 가게에서 본 적 있는 관웅의 동업자였다. 남다른 언변과 투자 감각으로 대학을 중퇴하고 쭉 형과 사업을 같이 해왔다고 했다. 주변에 사람들이 가득했지만 나는 함께 하는 자리에서 사람을 훑는 그 사람의 의뭉스러운 눈빛과 지나치게 입 속의 혀처럼 구는 언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학생인 네가 무슨 돈이 있겠냐만…. 나도 이런 말을 하는 내가 너무 비참하다, 백기야.”


모아둔 돈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명문대 타이틀은 이럴 때 가장 유용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학부모와 대입을 준비하는 아이들에게 굉장한 신뢰감을 부여했다. 입학 후 지금까지 평균 서너 건, 방학 때는 다섯 건까지 뛰는 과외로 제법 쏠쏠하게 통장 잔고를 채워가고 있었다. 관웅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닥 지출할 일도 없었기에 출국 전 통장 잔고는 3,000만 원을 상회했다. 그 중 유럽여행 자금으로 옮겨놓은 500만 원으로 제하면 여전히 적금통장에는 2,500만 원 가량이 다달이 이자를 불리고 있었다.


평소의 관웅에게 그 정도 돈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의 옷장에 스타일별로 갖추고 있는 정장 한 벌의 값이 내가 파리까지 왕복 비행기 값과 맞먹었다. 가게를 한두 달만 잘 굴려도 그 정도 돈은 쉽게 갚을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나는 망설임 없이 돈을 빌려주겠노라 약속했다.


  “형, 지금 내 적금계좌에 2천 좀 넘게 있을 거예요. 그거부터 필요하면 쓰세요.”


관웅은 망설이지 않고 고맙다 했다. 메모 준비됐어요? 물은 나는 통장 비밀번호부터 내 자취방 어디에 주민등록증과 인감이 있는지 술술 읊었다. 응응, 하며 받아적은 관웅이 미안하다,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다.


  “어, 백기야. 정말 고맙다. 형이 돈 생기면 꼭 이것부터 갚을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잘 해결될 거예요. 형, 내가 사랑하는 거 알죠?”

  “그럼. 너 올 날만 기다리고 있어. 내 장백기, 보고 싶다.”


그 말에 나는 조금 웃었다. 지난 몇 주간 우리 사이에 오가지 않았지만, 꼭 듣고 싶었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일 해결되면 연락 줄게. 사랑해. 그리고 미안하다.”

  “응, 나 학기 다 끝났으니까 여행 끝나고 바로 형한테 달려갈 거야. 보고 싶어요!”


그땐 그 미안하다는 말의 의미를 감히 짐작도 못했다. 처음 사귀었을 때처럼 통화 끝에 붙은 간지러운 쪽, 소리와 사랑한다는 말에 옆에 있는 느낌이 들어 얼굴을 붉혔을 뿐이다. 보고 싶다는 말이 튀어나가는 순간 아래가 들썩거리는 것도 같았다. 다정하게 나를 안던 얼굴과 손길과 낮은 목소리, 단단한 몸의 움직임까지 차례로 떠올린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를 떠올리며 오랫동안 아래를 흔들고 손가락 삽입까지 시도했다. 끙끙거리며 두 번째로 사정한 후에는 이상하리만치 관웅이 보고 싶어져 눈물이 났다. 출국 후 처음으로 빨리 한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다음 주부터는 불안한 마음을 누르며 출국 전부터 계획한 유럽여행길에 올랐다. 파리에서 출발해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에 걸친 2주간의 여행을 최대한 즐기려 애썼다. 인터넷 접속이 되는 곳이면 나는 에펠탑과 괴테의 생가, 각종 광장 앞에서 찍은 사진과 안부 인사를 애인에게 전송했다. 첫 일주일 동안은 보내기 무섭게 읽고 조심하라는 당부를 하던 관웅의 메시지는 그 다음 주부터 드문드문해졌다. 읽는 속도도 처음에 비해 턱없이 느렸다. 너무 바쁘거나 인터넷 연결이 불안정해 메일 전송에 오류가 있겠거니 여기며 나는 로마에서 출국 수속을 밟았다. 


10시간이라는 지루한 비행을 마치고 인천공항에 도착했을 때야 섭섭함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일정을 빤히 아는 그가 마중을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차가운 공기가 훅 끼치는 겨울의 햇살이 괜히 서러웠다. 연락이 안 돼서 그런 건 아닐까 싶어 서둘러 재개통한 휴대폰에는 간단한 안부인사도 없었다. 짐을 꾸려 공항 리무진을 타고 집으로 향하면서 괘씸한 생각에 슬슬 부아가 치밀었다. 미묘한 심리싸움을 하던 나는 결국 한참 망설이다 관웅의 번호로 먼저 전화를 걸었다. 전화 속에서 흘러나온 건 얄밉지만 반가운 목소리가 아니라 낯선 여자의 목소리였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이오니 다시 한 번 확인하시고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럴 리가……. 전화번호를 바꾼다는 어떤 언질도 없었다. 급하게 노트북을 꺼내 메신저에 접속했지만 그의 흔적은 ‘알 수 없음’이라는 심란하고도 간단한 말로 대체되어 있었다. 그가 운영하는 가게로 전화해도 신호음만 길게 이어지다 뚜― 하는 머리 아픈 소리만 이어졌다. 열 번째 그 소릴 들었을 땐 손이 무섭게 떨렸다. 차분히 심호흡을 하며 나는 그가 중2병 걸린 애도 아니고 한 마디 말도 없이 잠수를 탈 인간은 아니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마지막으로 전화번호부에서 연락처를 받은 이래로 한 번도 통화한 이력이 없는 망할 놈의 이주형에게도 통화를 시도했다. 역시 같은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그게 왜 오히려 안심이 되었을까. 빚쟁이들에게 시달리다 못해 번호를 바꾼 걸 수도 있어.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해 내린 결론이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은 건 집에 도착하고 나서였다. 한동안 사람의 출입이 없어 먼지가 쌓인 현관에 오렌지색 등이 켜졌을 때 느낀 건 안도감이나 편안함이 아니었다. 집이 이상하게 휑했다. 캐리어를 그대로 현관에 놔둔 채 쫓기듯 신발을 벗고 들어섰을 때, 나는 집에 있던 티비며 취미용으로 즐기던 고급 자전거, 데스크탑과 모니터까지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도둑이 들었다기엔 방안이 너무도 정갈했다. 그는 사라지는 순간까지 동화 같은 연출을 즐겼다. 허탈하게 웃으며 방 안을 하나씩 점검하다가 옷장을 열었을 땐 천관웅의 취향이 분명한 고급 정장 한 벌이 걸려있었다. 빤하고 우스운 사과 편지와 함께.




Fashionably Invited 패셔너블리 인바이티드 

#1st Invitee: 천관웅 / 관웅백기





Comments:  사약인 걸 알면서도 제조를 멈추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얼마 간 너무 앵슷에 취해있었고  구상 중인 이야기들도 어둑어둑해서

분위기 전환차 쓰기 시작한 글입니다. 몇 편까지 갈지는 모르겠어요.


1-2세대 아이돌 팬픽 [연애대백과사전] 시리즈 아시는 분 계신가요?

이 글은 그런 맥락의 장백기_연애사.zip  정도로 보시면 됩니다.

백기의 20대를 거쳐온 파란만장한 연애담이 소개될 예정이에요!


글 안에 백기른 기반의 여러 커플이 나온다는 점알고 가시면 좋아요,

노파심에 서론이 길었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_♥



'My Fluid Fantas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석율백기] YES NO MAYBE  (3) 2015.09.20
[백기른] Fashionably Invited #2  (0) 2015.08.17
[석율백기] 화사 花蛇 II (19+/Fin.)  (2) 2015.06.25
[석율백기] 화사 花蛇 I  (0) 2015.06.20
[해준백기] 너만 모르게  (8) 2015.05.28
댓글
공지사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