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My Fluid Fantasy

[석율백기] 화사 花蛇 I

멜티드 2015. 6. 20. 20:25


Note:  상속자들 최영도 시점. 미생 율백(석율백기) 중심 그래백기 요소 포함.

PC 혹은 Soundcloud 지원 환경에서 BGM과 감상하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모바일에서는 재생 버튼을 한 번만 눌러주세요.)



나를 둘러싼 것들이 거짓말처럼 변했다.

   .

.   

    .

.      

.


   蛇  

   사  


첫번째 이야기 | 뱀의 전설





01.


새 학교는 공립이었다. 학기가 시작된 고3의 전학을 받아주려는 학교가 없어 한동안 애를 먹었다. 현 정권의 눈 밖에 나 검찰조사를 받은 호텔제우스 오너의 외아들. 연초 그 정도였던 내 신상에 최근 한 줄이 추가되었다. 아빌 닮아 손버릇 나쁜 망나니. 스무 개가 넘는 학교에 연락을 돌리다 지친 비서실장은 유학을 권유했으나 최 회장은 단칼에 거절했다. 감시를 벗어난 타지에서 내가 더 날뛰리라는 계산에서였다. 지리한 혈연이나 장차 그룹을 물려받을 재계 인사가 상고나 공고, 대안학교를 갈 수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 자명했다. 


겨우 하나 찾아낸 게 서울 외곽의 공립 학교였다.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게 하려고 집안에서는 파격적이다 못해 굴욕적이기까지 한 제안들을 수용했다. 매서운 얼굴과 쇠 같은 고집으로 사람들의 기를 꺾어놓던 이도 벼랑 끝에 내몰린 경험을 통해 타협하는 법을 배운 모양이었다. 기사를 대동하는 등 주목받을 만한 행동을 하지 않을 것, 소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 반드시 교칙을 준수할 것… 나열된 항목들 밑엔 으름장 같은 문구가 자리했다. 이를 어길 시에는 즉각 퇴학조치함. 변호사인 비서실장이 직접 공증서류까지 제출하고 나서야 전학수속이 시작됐다. 


덕분에 집을 하나 얻어 독립했다. 호텔에서나 본가에서 등교만 한 시간 반이 걸리는 거리에다가 기사 대동이 금지된 상황에서 최 회장으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3, 4월 내내 전학 문제로 끙끙 대고 나니 진로 문제도 집안 문제로 대두되었다. 부자(父子)는 이미 공부로 진학하기엔 늦은 시기였음을 시인하고 대안을 찾았다. 다행히도 내게는 미적 감각이라는 게 있었다. 미술사 전공이람서 유학도 못한 천한 것이 운 좋게 제국그룹 재단 미술관에서 학예사로 있다 막 MBA 마친 니 애비를 후렸지. 그래놓고 도망을 가긴 왜 가, 꽃뱀 같은 년…. 엄마가 화실로 쓰던 다락을 지날 때마다 이맛살을 구기던 우리 집 늙은 독사의 얘기에서 그 재능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모자지간 아니랄까봐 미술이란 소리에 똑같이 표정부터 굳히던 최 회장은 비서실장의 논리적인 설득에 넘어갔다. 디자인 계열로 커리어를 쌓으면 그룹에도 도움이 될 것 같다는 게 골자였다. 호텔 산업은 실내 디자인과 접점이 있는 사업이었고, 적당히 국내에서 대학에 진학한 후 유학으로 학벌세탁을 하기에도 그만이었다. 하루 3시간씩 입주 미술 과외 선생을 붙이고, 수능 성적을 맞추기 위해 주 3일 국영수 과외선생이 오는 조건으로 예체능반으로 들어갔다. 전교생의 인원 수에서 꿈쩍을 안 하던 내신석차에도 변화가 생겼다. 가파르게 성적이 뛸만큼 열심히 한 게 없었건만 제 등수 뒤로 몇 십명이 더 존재했다. 반수가 넘게 수업에 들어오지 않거나 하루종일 엎드려 있어도 선생들은 별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문/이과를 5반씩 나눠 각각 1반, 6반부터 성적순으로 반을 편성하고 4층 끝 예체능반을 몰아넣었기에 반 분위기는 한층 심각했다.




02.


중간고사가 끝나고 바닥을 기는 반 평균성적을 확인한 담임은 아침부터 푸념을 늘어놓았다. 얘들아, 1반처럼 열심히 좀 하자. 대학 갈 생각은 있는 거니? 질린 얼굴로 고개를 흔드는 어린 여 선생은 사람을 휘어잡을 줄 몰랐다. 전학 온 첫날, 내 학생부 기록을 확인하곤 당황한 빛을 감추지 못하던 담임은 능구렁이 같은 선생들 사이에서 떠밀리듯 예체능반을 맡은 듯한 인상을 주었다. 그녀를 기다린 건 교무실의 나이 지긋한 선생들보다 계산적이고 약삭 빠른 서른 명의 시커먼 소년들이었을 것이다. 물론 드문 확률로 예외는 존재했다. 담임의 얘길 들은 체 만 체 웅성거리는 소음 속에서 밝게 대답하는 단 한 명.

 

  “네! 쌤, 근데 중간고사 전교 1등은 장백기에요? 장그래에요?”


맨 뒷자리에서 양손으로 껌을 씹는 턱을 받치며 귀염을 떠는 블론드 헤어는 전교생이 아는 유명인사였다. 공개 오디션 프로에서 인기를 얻어 지금은 대형기획사에서 연습생으로 있다고 했다. 곱게 생긴 한석율은 해맑은, 그러나 시끄럽지 않은 목소리로 술렁이던 교실의 소음을 갈랐다. 단숨에 조용해진 교실의 미묘한 기류 변화에 담임의 얼굴에 당황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어…, 백기라더라. 서울대 수시 원서 준비하러 아까 잠깐 내려온 것 같던데. 오예! 담임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한석율은 입에크게 호선을 그리더니 휘익 휘파람을 불며 웃었다. 출석체크 후 담임이 빠져나간 교실은 다시 시장통을 방불케 했다.


  “장백기가 누군데?”

  “헐...”


다음 시간이 뭐냐는 수준으로 옆자리에 물었는데, 반응이 심상찮다. 사방에서 너 한번도 장백기 본 적 없어? 얘기도 들은 적 없다고? 하며 놀란 눈빛이 꽂혔다. 전학 오자마자 중간고사 친 애가 그걸 어떻게 알아, 하는 동윤을 시작으로 재호와 다른 아이들이 술술 설명을 덧붙인다. 


  “장백기― 어느 날 이 꼴통 학교에 나타난 외고 출신 도련님이지. 걔네 아빠가 강남에서 잘 나가는 사업가란 말도 있고 해서 최영도가 전학왔을 때만큼 쇼킹했다 이거야. 여태 선생들한테 주목받던 건 중학교 때부터 전교 1등하던 장그래 밖에 없었그든. 근데 새 페이스가 1학년 첫 중간고사 끝나자마자 전학을 뙇!!!”

  “전학오기 전부터 유명했어. 전학 상담할 때 서울대 갈 건데 외고 내신이 불리해서 지역균형 선발 노리고 왔다는 폭탄선언을 해갖고…. 교무실 있던 1반 부반장이 그걸 듣고 반에 다 까발린 겨.”

  “여기서 대학 가보겠다고 아등바등하는 1반 애들한텐 딱 미움 받기 좋았지. 정작 장그래는 그 얘길 듣고도 태연했고. 실제로 오고나서도 대놓고는 못 그러지만 다들 재수없다고 거리두기도 했고. 레알 쇼킹한 건 장백기 전학 오고 나서 젤 많이 챙겨준 게 장그래라는 거야. 기말엔 장씨 듀오가 사이좋게 전교 1,2등 나눠먹으셨어요. 웃긴 건 내신 짱 먹으러 왔다던 장백기가 1학기 기말, 2학기 중간까지 계속 2등이었다는 거지만. 도도한 두 분이 애틋하게 구는 꼴 같잖은 상태가 한동안 유지됐어.”


걔가 한석율이랑 붙어먹기 전까진―. 살곰 뒷자리의 눈치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춘 재호가 재빨리 덧붙였다. ‘붙어먹다’니? 어떤 의미인지 다음 말을 기다렸으나, 귓가에 넘어오는 건 비화를 속삭이는 목소리가 아니라 검열의 인사였다.


  “어이, 친구들∼ 전학생이랑 뭐 재밌는 얘기해?”


아, 아냐. 앞자리에서 내 쪽으로 돌아앉았던 재호가 번뜩 책상 서랍에서 문학 교과서를 꺼내놓으며 손을 내저었다. 한석율의 등장을 기점으로 내 쪽으로 고개를 쭉 빼고 있던 다른 녀석들도 자세를 고쳐앉으며 딴청을 피웠다. 귀여운 새끼들. 한석율이 한 손으로 재호의 머리칼을 흐뜨려놓는다. 친밀한 말투와 달리 손끝엔 칼바람 같은 기운이 서렸다. 계집애들처럼 무슨 얘길 그렇게 속삭여∼ 한석율의 목소리에 바싹 긴장해 어색한 동작으로 깨끗한 교과서를 펴는 재호의 손이 떨렸다. 선생과 수업의 가치를 바닥에 내던진 너저분한 분위기 속에서 이곳 아이들은 이상한 쪽으로 순진했다.


학주가 개처럼 소리를 질러도 좀처럼 통제가 되지 않는 반 아이들은 한석율의 말 한마디, 손짓 하나에 파사삭 얼었다. 그가 늘 여유로운 말투와 웃음을 띄우고 친근하게 웃어주면 잘 훈련된 개처럼 열심히 반응하는 모습은 히틀러의 연설에 박수갈채를 보내는 이들의 눈빛과 다를 것이 없었다. 돈과 영향력을 자랑하는 대신 한치 앞도 불투명한 가수 지망생 따위를 우상화하는 순진한 또래들. 나는 여전히 덜덜 떨고 있는 재호의 팔꿈치를 꾹 잡아준다.


그때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온 문학 선생은 엉망인 상황을 정리할 생각도 않고 기계적으로 판서를 시작했다. 교실 안 수십 개의 불안한 눈동자는 한석율을 향했다. 오직 그만이 무질서한 교실에서 이런 이상한 긴장감을 유발하고, 흐뜨러뜨릴 수 있었다. 정적이 흐르는 교실에서 한석율은 쌤 안냐세요! 발랄하게 문학 선생의 존재를 일깨워주고 유유히 제자리로 찾아갔다.


  “전학생이 궁금한 게 많은 건 알겠는데― 장백기 얘기를 듣고 싶으면 나한테 물어.”


별로 알고 싶지 않은 것까지 다 알려줄게, 응? 비적거리며 걷다가 우뚝 멈춰선 한석율이 내 어깨를 꾹 누르며 귓가로 짓씹힌 문장을 내뱉고 다시금 웃었다. 선하게 휘어지는 눈꼬리와 신경을 긁는 미소는 소름 돋는 부조화였다. 그리곤 거짓말처럼 지워지는 웃음…. 수업 내내 나는 그 부조화를 곱씹었다. 성적 따위엔 관심도 없을 딴따라가 전교 1등 얘기에 과민하게 구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아무도 집중하지 않는 수업을 마치고 시든 꽃처럼 나가는 선생과 아무렇게나 자라나 교실 안팎을 덮어버린 잡초 같은 아이들처럼 이 학교에는 생경한 조합이 몇 가지 존재했다. 한 번 열리면 끝없이 이어지는 남고생들의 호기심이 짙게 깔린 목소리는 감히 내뱉기를 주저하면서도 어떤 부자연스러운 조합에 대해 떠들었다. 그 이야기의 중심에는 한석율과 장백기가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03.


멋대로 흩어졌던 아이들의 얼굴을 전부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은 점심시간이 유일했다. 덜자란 사내녀석들은 지하에 위치한 급식소로 이어지는 긴 줄에서 조금이라도 앞자릴 유지하기 위해 계단이 쿵쿵 울리도록 뜀박질을 해댔다. 자습을 시키고 사라진 윤리 선생 덕분에 우리 반이 오늘의 선두였다. 부스스한 얼굴로 주머니에 손을 꽂고 걸어오던 한석율은 뒤쪽에서 누군가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내 놔.”

  “점심시간엔 이런 거 안 보기로 했잖아. 밥 다 먹으면 줄게.”


쟤야, 장백기. 뒤에서 승찬이 귓가에 속삭였다. 한석율이 애교스럽게 치대는 와중에도 웃어주지 않는 하얀 얼굴과 검은 무테의 안경을 치켜올리는 손짓, 주변 환경과 어울리지 않는 어떤 고고함 같은 것이 그 애를 둘러싸 눈길을 끌었다. 한석율의 손에 들린 수첩을 노려보던 장백기는 포기했다는 듯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떴다. 그의 눈꺼풀이 새초롬히 들어올려지는 박자에 맞춰 해사한 웃음을 건 한석율이 깨끗한 교복 어깨 위로 손을 걸치더니 곧 정연하게 늘어진 줄에서 장백기를 빼냈다. 어깨 동무 자세로 반쯤 끌려가던 장백기는 이내 그 손을 치우고 도도한 걸음으로 보폭을 맞춘다. 팔랑거리며 줄의 제일 앞쪽으로 다가온 한석율은 장백기의 허리를 잡아 제 앞으로 밀어넣었다. 빽빽히 늘어선 대열에서 순식간에 장백기가 가장 먼저 배식을 받게 되었지만,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다.


  “백기, 많이 먹고 힘내야지. 아주머니, 여기에 반찬 많이 주세요!”


식판 사정까지 간섭하며 눈웃음 치는 한석율의 부산한 행동에도 장백기는 조각상처럼 표정없이 식판에 음식이 담기는 걸 바라볼 뿐이었다. 한석율은 배식대와 가장 가까운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익숙하게 마주앉은 둘 사이에서 입을 열며 조잘거리는 건 항상 한석율이었다. 노래하는 듯 즐거운 얼굴로 실 없는 얘기를 늘어놓으며 그치, 백기야? 동조를 구하는 눈웃음엔 흥이 가득해 아침과 같은 사람이라는 걸 믿기 힘들었다. 


야, 장백기 존나 얼음공주 빙의했어. 한석율이 저렇게 열정적으로 입터는데…. 서너 테이블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둘을 관찰하던 동윤이 키득거렸다. 그니까 쟤네가 저런 관계를 유지하는 게 존나 미스테리 아니겠냐고오∼ 승찬이 수저로 국을 휘저으며 말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음식을 우물거리며 저쪽의 눈치를 살피던 재호가 헐, 저기… 하며 젓가락을 든 손으로 배식대를 가리켰다.


  “그래그래 장그래∼ 오랜만이네? 여기 앉아.”

  “됐어.”

  “어허, 앉으래도. 백기도 있잖아.”


바로 옆에서 날아든 목소리에 식판을 들고 선 곱상한 얼굴이 움찔했다. 불가침구역처럼 다들 한석율과 장백기의 자리에서 멀찍이 떨어져 앉은 탓에 그 안의 움직임은 더 도드라졌다. 우연히 친우를 본 듯 반색하며 옆 자리 의자까지 빼서 팡팡 두드린 한석율의 강권은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입에서 장백기의 이름이 나오자 한층 더 딱딱한 눈빛을 한 장그래가 한석율이 가리킨 자리에 풀썩 앉았다. 그래, 우리 그래는 요즘 성적이 좀 어때? 샐샐 웃으며 말을 걸어오는 한석율을 무시하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장백기와는 다른 견고한 방어막을 두었다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몰랐다. 장그래는 귀에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그 둘을 철저히 무시하며 눈 한번 마주치는 일 없이 밥을 퍼먹었다.


존나 골때리네. 숨을 죽이며 셋이 하는 양을 넋빠진 듯 지켜보던 승찬이 고갤 저었다. 왜? 뭐 잘못됐어? 심드렁하게 김치를 들어 올리며 묻자 재밌는 얘기가 이어진다.


  “한참 잘못됐지. 엘리트 장씨 듀오가 갈라선 원흉이 한석율 아니겠냐? 쟤가 원래 저런 타입을 곁에 두고 싶어해. 반반하고 도도한데 백치는 아닌 애들. 첨엔 장그래를 건드렸는데, 상대를 잘못 골랐지. 꿈쩍도 안 하는 장그래 두고 질려하던 차에 장백기를 발견한 거라고 보면 되나? 1학년 여름방학 때 뭘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장백기가 그, 뭐랄까... 환승?이라고 해야하나? 장그래를 버리고 한석율 쪽으로 환승한 거야. 당연히 장씨들 사이가 존나 미묘해지고, 2학기부터 장그래 성적이 곤두박질치면서 의문이 퐁!퐁! 솟았다 이거에요. 그 후로 장그래 성격도 많이 변했어. 두루두루 애들이랑 잘 지내서 존나 청소년 드라마 나오는 모범생 같던 새끼가 지나치게 예민하고 방어적이 되서 애들한테 미움 사고…. 지금도 봐, 거의 혼자 다녀.

  “그래서 그때 남자들끼리 오르내리기엔 좀 그런... 얘기까지 많이 나왔어. 장그래도 미친 독종 인증을 한번 하고. 1학년 2학기 기말고사 두번째 날― 수학이랑 사회 본 날 맞지? 미친, 내가 이딴 걸 다 기억하네. 암튼 새벽에 등교하는 장그래가 그날 시험 시간이 다 됐는데도 안 온겨. 1반 담임이 집이랑 핸드폰으로 전화 돌리는데 응답도 없고 해서 반마다 물으러 다니고 난리가 났었어. 그렇다고 전교 1등 안 온다고 기말고사를 미룰 순 없으니까 일단 시험은 시작됐지. 근데 두번째 시간 중간쯤 되서야 피떡이 되갖고 나타난 거야. 놀란 시험 감독이 보건 선생까지 불러왔는데, 정작 장그래는 들어오자마자 지 자리 앉아서 피 줄줄 흐르는 손으로 시험 봤다는 거 아냐. 그렇게 20분 만에 손 덜덜 떨면서 풀었는데 사회 만점 받은 미친 새끼잖아.”

  “그게 얼마나 끔찍하고 충격적이었으면 같은 반이었던 새끼들은 심심하면 그 얘길 꺼내겠냐. 지들이 오히려 놀라서 시험 망쳤다고.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그냥 오다가 다쳤다고만 하니까 어쩌겠어. 아무리 장그래라도 수학은 아예 미응시로 0점 처리됐어. 당연히 전교 성적은 존나 떨어졌지. 그래서 1학년 마지막 기말고사부터는 장백기가 자연스럽게 전교 1등 자리 눌러앉고. 근데 시발, 저런 소름돋는 조합으로 동석이라니….”


윽― 내가 다 소화가 안 되네. 체기가 얹힌 시늉을 하던 아이들의 말은 거기서 멈췄다. 음식이 한참 남은 식판을 들고 일어선 장백기의 뒤를 따라 한석율이 의자를 빼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그래, 장그래 많이 먹고 분발해? 묘하게 신경을 긁어놓는 웃음을 걸며 등까지 토닥인 한석율이 빠른 보폭으로 몇 걸음 앞선 장백기를 쫓아갔다.




04.


어울리지 않는 두 실루엣이 시야를 휘저었다. 초여름 급식실엔 싸한 공기가 맴돌았다.


하나, 

둘, 

셋. 


시종일관 식판에만 꽂혀있던 장그래의 고개가 서서히 들렸다. 정갈한 얼굴에서 야차의 눈빛이 시퍼렇게 맴돌았다.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로 한참이나 장백기와 한석율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시야에서 그 둘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장그래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숟가락질을 했다.


어떤 부조화(不調和)는 잔상처럼 오래 남아 씻기지 않는 불화(不和)를 일으키고 사라진다. 장그래의 어깨 위에 짙게 내려앉은 고독과 눈 안 깊숙한 곳에 자리한 독기가 그것을 증명했다. 수저를 꾹 쥐고 애써 짓누르는 파괴에 대한 욕망이 그의 선량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아 의문을 자아냈다.






화사 花蛇 

첫번째 이야기, 뱀의 전설 Fin.


▶ 다음 글: 화사 II (19+ / Fin.)





석율백기 그래백기 율백 글백 영도백기




Comments:  제목은 서정주의 시에서 가져왔습니다. 

그와 비슷한 분위기의 질척한 학원물을 예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분량은... 아마 다음편에서 미친 듯이;; 휘몰아치며 끝날 예정입니다.


백른전에 낼 예정이었던 글이라 애정관계가 복잡합니다.

율백이 중심이나 그래백기, 해석하시기에 따라 영도백기 요소도 있어요.

최영도를 화자(話者)로 설정한 건 영도의 가정사/트라우마/문제아 세 키워드가 

글을 이끌어가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픈 손가락 영도ㅠㅠ


설명이 길었네요.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
공지사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