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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  미생 해준백기 / 석율백기 트리플.

PC 혹은 Soundcloud 지원 환경에서 BGM과 감상하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안녕, 나는 너의 피핑 톰.

사랑에 빠진 너를 탐하며 주린 마음을 채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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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貪) 하나 더       



함께 할 사람이 있는 밸런타인데이는 선물 같았다.


그게 꼭 나한테만 해당되는 건 아니어서 예상 못한 자유를 얻기도 했다. 어, 오빠야~ 딱히 그런 건 아니고 오빠가 맛있는 저녁이라도 살까 해서. 아직도 나쁜 버릇을 버리지 못한 성준식은 오늘도 하루종일 틈만 나면 아는 여자 목록에 전화를 돌렸다. 그 중 하나가 불쌍하게 걸려들은 게 분명했다. 썽뉴라, 구미 공장 쪽에서 온 팩스 받으면 과장님 책상 위에 올려놓고 퇴근해라. 평소보다 들뜬 철없는 사수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장백기에게 문자를 보낸다.


 [성 대리 퇴치 완료, 오늘 밤, 술 약속, 성공적^^]


한참 사라지지 않는 숫자 1을 보며 고개를 갸웃할 뿐이다. 강 대리 그 양반, 이런 날까지 우리 백기 초절임으로 만들고 있는 건 아니겠지? 제게는 장백기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거리를 두는 그 딱딱한 얼굴을 떠올린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나는 때마침 드르륵거리는 복합기에서 인쇄된 종이를 받아들고 업체에 마지막 확인 전화를 건다. 6시가 되기 무섭게 빠져나간 인력 덕에 급한 이슈가 생겼다던 화학3팀 자리를 제외하곤 적막만 가득했다. 랩탑 전원을 끄고 자리를 정돈하는 내게선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오케이, 깔끔해. 어젯밤부터 고심해서 고른 짙은 밤색의 코트를 둘러입고 화장실까지 한 번 들른 나는 걸음을 바삐 계단으로 옮겼다.


여기도 만만치 않군. 평소와는 다르게 이른 시간에 어둠이 내려앉은 15층에서 환하게 노트북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받고 있는 건 장백기 밖에 없다. 백기 씨, 왜 퇴근 안 하고 있니~ 평소처럼 인사하려던 나는 벽 한쪽에 비스듬히 기대 지척에서 사람이 들어오는 것도 모른 채 일에 집중한 장백기의 모습을 살핀다. 4시 반이 지나면 왁스로 빳빳하게 길을 들인 공이 무색하게 서서히 가라앉아 아침보다는 순해보이는 인상을 주는 머리칼부터 꼼꼼하게 문서를 훑는 눈과 긴장할 때면 늘 물고 있는 통통한 입술, 고개를 살짝 숙여 선이 드러나는 목덜미와 움츠러져 있어 어쩐지 가득 안아주고 싶은 등까지. 오만한 눈빛과 자부심을 옷처럼 두르고 다니는 헛똑똑이. 그 첫 감상이 무색하게 어느 틈에 나는 눈을 감고도 장백기의 사랑스러움을 형상화할 수 있게 되었다.


장백기 책상의 비어있는 물컵을 확인한 나는 익숙한 15층 탕비실로 향한다. 머그컵을 꺼내고 냉장고에서 누가 갖다놓은 건지 모를 레몬청까지 꺼내던 중이었다. 쓰레기통 안에서 반짝반짝 빛을 내는 무언가에 시선을 빼앗긴 것도 동시에 일어난 일이다. 응? 새 거 같은데…? 그대로 싱크대에 컵과 병을 내려놓고 쓰레기통 안에 처박힌 상자를 집어든 나는 손바닥만한 것을 슬쩍 흔들어 본다. 토로록 소리와 무게감으로 보아 새 것이 분명한 고급 초콜릿이 리본 포장도 벗겨지지 않은 채 처량하고 우아한 모양새로 버려진 이 사태에 기가 막혔다. 예쁘고 우아한 건, 더구나 그 안에 수줍은 마음을 품고 있는 건 품위 있게 다뤄줘야 하지 말입니다. 잔인한 누군가를 욕하며 탁탁 먼지를 털어내고 코트 안주머니에 상자를 넣은 나는 다시 싱크대로 돌아가 장백기를 위한 레몬차를 탄다.


 “장백기 씨, 차 배달왔는데요.”


뒤로 살금살금 걸어가 슬쩍 책상을 노크하듯 두드리며 눈웃음 짓자 장백기의 지친 눈이 크게 떠진다. 아, 석율 씨.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스친다. 반나절 만에 약속을 잊은 거다. 이토록 무심하고 자기 중심적인 장백기.


 “아, 잘 마실게요. 그리고 연락 못 줘서 미안합니다.”

 “별로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은데? 백기 씨 이것만 하고 가면 되는 거 아냐?”

 “그건 그런데… 저, 오늘 술 마실 기분이 아니라서요.”


눈을 피한 채 고개를 떨구고 한다는 말이 그거다. 점심시간까지만 해도 뭔지 모를 기대감으로 어수선하던 기운을 폴폴 풍기던 장백기에게서 몇 시간 만에 굴욕감이 전해진다. 


 “그렇다고 집에 가봐야 뭐해. 백기 씨 주말까지 밥도 안 챙겨먹고 이불 속에 틀어박혀 있을 거 잖아. 그럼 월요일 출근할 때 기분 뭐 같다니까. 우리 재미없게 그러지 말자. 오늘은 내가 살게”


키킥 장난스러운 웃음으로 장백기를 달래며 진심을 감춘다. 밸런타인데이에 서투르게 고백하다 거절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구는 모습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건 내가 못 견뎠다. 마지막으로 기획안을 검토하겠다는 장백기를 재촉해 메일을 쓰게 했다. 내가 15층에 내려온 후로 몇 번이고 같은 페이지만 읽고 있던 장백기에게 백기 씨, 그거 한 열댓번 읽은 거 같은데? 하자 후다닥저장 버튼을 누른다. 나는 장백기의 소지품을 챙겨 얼른 자리를 정리하기 바쁘다. 딴 생각을 하는 장백기의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함이다. 그의 가방까지 내가 들고나오자 뒤늦게 흐트러진 넥타이를 정리하며 나를 따라나온 회색 코트 차림의 장백기는 엘리베이터 앞에 다다라서야 목적지를 묻는다.


 “근데 어디로 갑니까?”

 “우리 집.”

 “네…?”

 “백기 씨, 생각해 봐. 오늘 같은 날 어딜 나가겠어? 가봐야 연인들만 수두룩 빽빽일텐데. 우리 자주 가던 포시즌? 거기 불금부터 정신없는 거 알잖아. 혹시 회사 사람들 마주치면 귀찮기도 하고. 이런 날! 한석율의 안락한 복층 하우스. 얼마나 좋아. 백기 씨 꽐라 되더라도 길바닥에 버려질 염려 없지. 졸리면 재워 주지.” 

 “남의 집에선 잘 안 잡니다.”

 “굳이 그렇다면 보내주고. 먹을 거랑 마실 건 우리 집 앞 마트에서 좀 사자. 차 가져왔으니까 모시고 갈게.”


둘 밖에 없는 복도에서 시선을 맞닿아오는 네게 입맞춤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 나는 괜히 창 밖으로 시선을 옮기곤 과장되게 손짓하며 변명한다. 널 초대할 요량으로 어제 저녁부터 집도, 차도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술을 마시면 몸을 못 가누는 탓에 택시가 없으면 집에도 못 찾아가는 네가 기어이 집에 찾아가겠다고 엄포를 놓지만 나는 보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어딘지 모르게 좌절한 장백기의 오후를 짐작하면서부터 내 뇌는 낚아챈 먹잇감을 탐욕스럽게 지키고 서 있는 짐승의 사고방식이 지배한 지 오래다.


▼ ▲ ▼ ▲ 


각종 초콜릿 상품들이 매대를 점거한 마트 안도 여지없이 연인들이 바글댄다. 우리 저 쪽은 가지 말자. 작게 끄덕이는 장백기의 동의 사인에 우리는 여러 섹션을 빙 둘러 주류 코너로 간다. 맥주 코너에서 좋아하는 밀맥주를 두어개 고른 너는 내가 고른 와인과 진, 토닉워터를 보곤 슬쩍 뒤로 물러서서 묻는다. 이걸 다 마시게요? 어차피 내가 사는 거 잖아.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곧 가늘어지는 눈과 혀를 내두르는 표정변화가 귀여워 웃음이 샌다. 그 다음으론 즉석에서 조리한 롤과 치킨을 담았다. 이렇게 같이 장을 보니 꼭 연인이라도 된 것 같아 나는 좀 더 욕심을 부린다.


 “우리 백기는 뭐 더 먹고 싶은 거 없어? 오빠가 다 사주고 싶은데.”

 “…… 혹시 미쳤습니까?”


스스로 느끼기에도 성 대리 같은 말투로 허리를 껴안으며 묻자 질색팔색을 하며 멀찍이 떨어져 걷는다. 크하하하 고개를 젖히며 웃던 나는 긴 계산대 줄에서 대기하고 있는 낯익은 차림에 시선을 옮긴다. 검은 코트를 입고 반듯한 걸음걸이로 카트를 미는 남자. 강해준이다. 이 주변 살았나? 어두운 톤의 피부에도 불구하고 냉담한 느낌을 주는 눈매가 트레이드 마크인 그가 옆을 보곤 따스하게 웃었다. 잘못 본 건가 싶어 시선을 떼지 않고 봐도 강해준 대리가 분명한 얼굴이 나란히 걷는 여자를 향해 다정한 눈빛을 건네는 모습은 여전했다. 저런 취향이야? 목덜미 위로 올라오는 검은 머리칼과 희지만은 않은 얼굴에 쌍커풀이 지지 않은 눈, 시원시원한 입매와 무채색 차림이 돋보이는 강해준의 연인을 힐끗 본다. 막 고개를 돌리는 강해준과 시선이 부딪힐 것 같은 낌새에 나는 재빨리 뒤를 돌아 장백기를 찾았다. 정장 바지를 입고도 아이처럼 저 끝 아이스크림 코너에서 허리를 숙이고 꺼낸 하겐다즈를 들고 오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감상하던 나는 결국 강해준에 대한 속보 전달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 ▲ ▼ ▲ 


처음으로 내 공간에 발을 들여놓은 장백기는 꽤나 감명 받은 표정으로 현관에 서 있었다. 한석율 씨 집, 생각보다 아늑하네요. 신발을 벗으며 한다는 소리가 귀여워 나는 뒤돌아 씩 웃었을 뿐이다. 내가 1층의 거실과 부엌을 횡단하며 장바구니를 옮기고 음식을 차리는 동안 장백기는 초조하게 그 모습을 지켜본다. 백기 씨는 오늘 손님이니까 소파에서 TV 보면서 앉아 있어. 그게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 건지 너는 쭈뼛거리며 뒤로 붙어 팬에 버터와 양파를 볶아내는 나를 신기한 눈으로 관찰한다. 


 “평소에도 이렇게 해 먹어요?”

 “그러엄. 나 양식 조리 기능사 자격증까지 있는 남자야.”


어딘지 경외감까지 느껴지는 말투에 나는 과장스럽게 대답했다. 백기 씨, 나한테 시집 올래? 그럼 매일 이렇게 맛있는 거 해줄 수 있는데. 집에 가면 레토르트나 배달음식으로 끼니를 떼우거나 쉽게 거를 네 모습이 그려져 내 목소리는 좀 애절하기도 했다. 빙글 웃으며 눈을 마주치자 코를 찡긋거리는 너는 또 당했다는 표정이다. 됐구요, 내가 뭐 거들 일 없어요? 그 불분명한 거절의 의사에 잘 놀리던 불에 화상을 입은 것마냥 마음이 따끔하다. 아까 사온 치킨이나 랩 벗겨서 전자레인지에 돌려 줘.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 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끓어넘치는 냄비를 식히듯 꾹꾹 마음을 눌러담는다.

 


와인 잔과 얼음이 가득한 와인 바스켓에 알코올 세팅을 마친 우리는 슬슬 늦은 저녁을 들기 시작했다. 배가 고팠는지 내가 만들어낸 프렌치 어니언 스프와 리조또에 바쁘게 수저를 옮기는 모습에 나는 마냥 웃지 못한다. 장백기에게 연인이 생겼을 지 모른다는 질투에 가까운 우려로 점심을 거른 나보다 네 허기가 컸던 걸 보아 무슨 일이 있었을 거라는 확신이 짙어졌으므로. 빈 잔에 따라준 와인을 식사와 함께 홀짝이던 너는 말랑해진 말투로 빗장을 하나 푼다.


 “동기들 다 같이 이런 자리에 함께 했으면 좋았을 텐데요.”

 “대박… 장백기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 진심이야? 장그래도?”

 “저 장그래 씨 싫어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는 건 우리 넷 밖에 없잖아요.”

 “그럼 백기 씨 요새 좀 섭섭했겠네.”

 “네, 장그래 씨는 요즘 자기계발로 바쁜 것 같고, 안영이 씨도 얼마 전부터 남자친구가 생긴 것 같던데요.”


의외에요, 씁쓸하게 웃으며 덧붙이는 네게 나는 그러게, 하는 가벼운 동조로 말을 이어간다. 난 영이 씨가 제일 늦게 연애할 줄 알았는데, 하며 네가 입술을 비죽 내민다.

…바보, 넌 한참 잘못 짚었다.


 ‘둘만 있고 싶어할 것 같은데. 우리가 빠져줄까요?’

 ‘누구든 꼬시면 넘어온다더니…. 저도 도와드릴 의향은 있습니다.’

 ‘헐헐…!!! 나 티 났어?’

 ‘모른 척 하기가 어려울 정도로요.’

 ‘보통 사내연애라면 발 벗고 말리겠지만, 어려운 상대이니만큼 도와드리겠다는 겁니다.’


네 뒷모습을 쫓는 내 변화를 가장 먼저 감지한 안영이가 동기 모임을 잡고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물어왔다. 옆에 있던 장그래도 어쩐지 측은해하는 눈빛을 숨기지 못하며 동조했다. 그렇게 고마운 지원군 둘이 빠지고 둘만 남게 된 동기 모임의 비밀을 내 앞의 장백기만 모르고 있었다. 몇 개월쯤 되면 한 번 의심을 해볼만도 한데 자기 주변의 일들조차 챙기기 버거운 철강팀의 신입에게 한꺼풀 뒤의 사정을 알아봐주길 기대하기는 무리였다. 나는 그저 웃으며 빈 잔을 채울 뿐이다. 네 눈과 입가와 마음이 점점 풀려가는 것을 관찰하면서. 


 “백기 씨는 오늘 초콜릿 좀 받았어?”

 “흐흐... 회사에서 저한테 고백할 사람이 어딨겠어요. 1년 하고도 반이 지났는데 강 대리님한테 깨지기나 하는 바보한테.”

 “왜, 요즘도 강 대리가 못 살게 굴어?”

 “아뇨……. 늘 일정하게 차갑죠. 저한테 대리님은….”


푸스스 한심하다는 듯 마른 웃음을 남긴 너는 금세 맥주캔을 비우고 바알간 포도주를 들이킨다. 나는 이로 입술을 꾹 물며 잔을 쥔다. 성준식보다 싫은 인간이 있다면 단연코 나의 장백기를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강해준이다. 내 앞에 있었다면 잔을 던져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묘하게 가라 앉은 분위기를 띄우려 슬쩍 일어서 아까 걸어놓은 코트로 발걸음을 옮겼다. 코트의 안주머니에서 주운 상자를 꺼내 들고 와 네 앞에 건넨다.


 “우울할 땐 단 게 최고야, 백기 씨. 이거 먹을래? 아까 주운 거야. 이렇게 예쁜 걸 왜 쓰레기통에 두고 갔을까.

 “15층 탕비실에 있던 겁니까…?”

 “왜왜? 누구 건지 알아?”

 “그거 제가 버린 건데…. 엄밀히 따지면 제가 돌려받음으로써 버림 받은 거지만요.”


내가 꺼내놓은 상자를 물끄러미 쳐다본 네 눈동자가 떨렸다. 이미 포장을 뜯어 초콜릿을 집던 나는 네 실토에 너를 둘러싼 공허함의 원인을 한 조각 받아든 기분이다. 허망하게 웃던 네가 와인병을 들어 잔을 채운 후 입을 연다.


 “한석율 씨, 이 초콜릿 브랜드에 얽힌 얘기 알아요?”

 “고디바?”

 “네, 여기 이 로고 속 여자 이름이 레이디 고디바에요. 천 년쯤 전에 살았던 영국 코벤트리 지방 영주의 아내죠. 당시 그 지방 농민들은 먹을 것도 풍족치 않은 피폐한 삶을 살고 있었는데, 정작 영주는 세금을 더 걷으려 했대요. 주민들의 삶을 보다 못한 부인이 과중한 세금을 제발 거두어달라고 남편에게 몇 번이고 간청했지만, 남편은 그런 그녀를 못 본척 하거나 심지어 그 마음을 우습게 여기는 남자였어요. 부인의 지속적인 청원이 지겨워질 때쯤 영주가 제안을 하나 해요. 정 그렇다면 네가 벌거벗고 말을 타고 나가서 마을을 한 바퀴 돌면 재고해보겠노라.”

 “잔인한 남자네, 그거.”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듯 조곤조곤 말을 이어나가는 네 모습에 빠져들었던 나는 점점 네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레이디 고디바는 그러겠노라고 약속해요.”

 “저런…. 아이러니하게 이걸 지조있다고 해야 하는 건가? 나라면 안 했을 거야.”

 “후후, 저도 그 여자가 바보 같았다고 생각해요. 무튼 그 소식이 마을에 퍼지자 농민들은 그녀가 가엾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서 레이디 고디바가 알몸으로 행차를 하는 날엔 아무도 집 밖을 나오지 말자고 자발적인 약속을 해요. 그리고 당일이 되자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레이디 고디바는 말에 탄 채 텅 빈 마을을 돌아요. 평소 아름다운 레이디 고디바의 벗은 몸을 궁금해하던 단 한 사람만 커튼을 열고 몰래 그 장면을 구경하려 했는데 그때 눈이 멀어버렸대요. 그 사람의 이름을 따서 관음증 환자를 피핑 톰(peeping Tom)이라 하고. ”

 “…….”

 “그녀는 마을을 돌고, 남편의 마음을 돌렸죠. 레이디 고디바는 전설처럼 지금까지 이야기가 내려오지만, 다들 그 우스꽝스러운 용기를 칭송할 뿐 누구도 그녀가 느꼈을 치욕을 헤아리진 않아요.”

 “장백기는 왜 그 여자의 감정을 헤아리려 하는데?”

 “오늘 그런 수치스러움을 느꼈거든요. 몇 번이고 거절의 의사 표시를 한 사람에게 간절하게 갈망하는 걸 얻으려다가.”


네 힘겨운 고백 후로 우리는 말이 없었다. 나는 한없이 착잡해져 새로운 잔을 꺼내 얼음을 딸까닥 채워넣으며 화를 누르려 애썼다. 토닉워터도 없이 진을 들이붓고 시큼한 레몬즙을 손으로 털어넣는데 눈을 가리는 네가 보인다.


 “장백기, 울어?”

 “아-니요, 눈에 레몬즙이 들어간 것 같아서…”


그 말과 함께 너는 맑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내가 급히 싱크대로 가 레몬즙이 묻은 손가락을 깨끗하게 닦고 티슈를 건넨 후에도 너는 눈물을 그치지 못한다. 결국 네 옆자리에 앉아 한 쪽 팔로 무너지는 어깨를 감싼 나는 네 떨림이 멎기를 기다린다. 차라리 네 눈물을 삼키고 싶다. 잔을 들며 하는 생각은 그 뿐이다. 팔을 뻗어 초콜릿을 만지작거리던 네가 입을 연다.


 “고맙지만 이런 건 필요가 없습니다. 오해의 여지가 있거나 불필요한 의미를 담은 선물은 불편합니다.”

 “…….”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사람이어서 따로 불렀을 땐 무슨 말을 할까 궁금했는데 들려온 말이 그거였어요. 부끄러움으로 귀까지 시뻘겋게 달아올라 어딜 봐야 할 지도 모르는 게 내가 꼭 그 여자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만해….”

 “……다른 사람들 앞에선 젠틀하게 받아주었던 초콜릿 상자를 돌려받는데 내가 너무 바보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장백기.”

 “나를 쳐다보는 눈이 꼭 종이를 읽는 듯 무감한데 그 안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내가 보이는 거에요. 그러겠노라고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대답하는 내가.”

 “백기야, 그만.”


고개를 들지 못하고 웅얼거리는 말소리는 얼굴을 감싸쥔 네 오른쪽 손에 한 번, 왼쪽 손에 한 번씩 반사되어 너와 나를 상처입혔다. 그걸 참지 못한 내가 네 손을 잡고 내리는데 마주한 얼굴에 눈이 멀 것만 같아 울컥한다. 나는 살짝 고개를 틀어 눈물을 흘려보내고 네 눈가를 닦아주었다. 그리고 찬찬히 아픈 말을 뱉어낸 붉은 입술에 내 입술을 마주 댄다.



백기야,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 레이디 고디바를 훔쳐보던 톰이 실은 그 여자를 가장 사랑한 사람이 아닐까.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을 걸 감수하면서도 그 여자가 홀로 도는 외로운 길을 지켜봐주고 싶었을 지도 모르잖아. 그 여자는 남편이 준 모욕감에 휩싸여 커튼 뒤에 숨어 자신을 가엾이 여기는 남자가 있다는 걸 절대 몰랐겠지만.


우리의 눈은 붉고, 너는 내 입술을 물고 울고, 나는 네 불행을 한 조각 붙들고 이루어지지 않을 꿈을 꾼다.


안녕, 나의 고디바. 

나는 사랑에 빠진 너의 불운을 탐하지.





탐 (貪) #2.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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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썸네일 이미지 Lady GodivaJohn Collier (1898)


한석율의 고디바와 장백기의 피핑 톰, (굳이 끼워맞추자면) 레오프릭 영주 강해준에 대하여.

이런 해백율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제 안의 강해준 상(像)이 너무 확고하단 걸 쓰면서 느꼈습니다.


매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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