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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Fluid Fantasy

[해준백기석율] 탐(貪) I

멜티드 2015. 2. 21. 01:19


Note:  미생 해준백기 / 석율백기 트리플.

PC 혹은 Soundcloud 지원 환경에서 BGM과 감상하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진짜 가지고 싶었던 게 하나 있어요,

 감히 내가… 싶다가도 뺏기면 화가 나고 집착하게 될 그런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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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貪) 하나       



함께 할 사람이 없는 밸런타인데이는 무료하다.


아침부터 사내에서 여기저기 분주하게 초콜릿이 오간다. 여사원들이 사수에게 ‘맛있게 드세요!’ 하는 상큼한 인사와 함께 초콜릿을 건네는 건 어쩌면 저렇게 어색함이 없을까. 가장 깔끔하고 자연스러웠던 영업 1팀 서무 반주영 씨의 ‘맛있게 드시고 힘내십시오.’ 하는 멘트를 몇 번이고 되뇌이다보니 어느 새 11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엔터만 몇 번씩 쳐 내려간 까닭에 하얀 화면이 끝없이 스크롤을 타고 내려가는 텅스텐 공급가격 상승과 관련된 문건은 눈에 들어오지 않은 지 오래다. 이제 겨우 수입 거래선의 리스팅을 마치고 본격적인 보고서 작성에 들어가려던 찰나 사내 메신저의 하늘색 창이 뿅 하고 떠오른다.


 [장백기~ 요즘 얼굴 보기가 너무 힘들다?(울음)]


굳이 발신인을 확인하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다. 내게, 아니 어쩌면 초면인 누구에게라도 살가운 인사를 건낼 수 있는 사람. 울상 짓고 있는 이모티콘과 꼭 닮은 표정이 눈 앞에 보이는 것 같은 섬유팀의 동기.


 [일찍 퇴근하려면 지금 열심히 해야죠.]

 [헙!!!!!!!!(놀람)(놀람)(놀람)]

 [백기 씨... 애인 생겼어????(심각)]

 [대체 누구야????(궁금)(궁금) 어??????(악마)]


느낌표와 물음표, 다채로운 표정의 이모티콘이 짧은 문장과 함께 1초 간격으로 빠르게 화면 위로 튀어오른다. 불꽃처럼 팡팡 터지는 문장을 따라가기가 버거울 정도다.


 [용건이 뭐에요?]

 [지금 내 용건 찾을 때야?]

 [안되겠다.]

 [장백기, 점심 먹고 나 좀 봐.]


이모티콘도 싹 사라지고 섬뜩해진 문장이 날아온다. 뭐야, 유치하게…. 마지막 말이 흡사 고등학교 때 힘 좀 쓴다 하는 녀석들의 공갈협박 같아 픽 웃음이 샜다. [그러시던가] 다섯 글자를 입력하고 메신저를 종료한 나는 공유폴더에서 참조문서 몇 개를 급하게 띄워놓는다. 표 하나와 두 문단 정도의 글을 작성하면서도 책상 한구석으로 밀어놓은 상자에 더 시선이 간다. 금빛 색지에 둘러진 차분한 브라운 리본 위로 브랜드 네임이 새겨진 그 안에는 정성들여 고른 초콜릿 트러플 12 피스가 들어있다. 


이번엔 늦지 않게 전달해야 했다. 크리스마스에 감사의 인사를 담은 카드와 함께 넥타이 핀을 전달했을 때, 의중을 가늠할 수 없던 상사의 태도가 내심 마음에 걸렸다. 나는 그게 타이밍의 문제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선물이나 그 안에 함께 포장한 감정에 대한 감상을 듣기도 전에 ‘월요일에 봅시다.’ 하는 퇴근 인사를 남기고 자리를 떴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파티션 사이로 고개를 내민 차 과장이 ‘나갑시다.’ 하며 자리를 정리했다. 저장 버튼을 누르고 노트북을 절전모드로 돌리려던 차에 오른쪽 하단의 날짜가 눈에 들어온다.


201x년 2월 14일. 철강팀 신입으로 입사한 지 1년 6개월. 옆자리에 있지만 사계절 내내 차갑기만한 강해준의 흔들림 없는 뒷모습을 쫓으며 나는 오늘부로 관계의 변화를 다짐한다.


▼ ▲ ▼ ▲ 


아, 이건 좀... 차라리 아침에 받은 초콜릿을 밥으로 먹겠네요. 맛의 기복이 큰 구내식당 음식에 관대하던 홍 대리의 입에서조차 불만이 튀어나왔다. 간이 안 맞아 맹맹했던 미역국과 지나치게 시큼한 시금치를 씹다가 과장님의 ‘천천히 먹고들 올라 와.’ 하는 말에 하나 둘씩 수저를 놓고 뿔뿔이 흩어진다. 평소보다 빠르게 양치를 끝내고 조용한 사무실로 들어오는데 분명 비어있어야 할 내 자리에 누군가가 앉아있다. 자리를 착각한 건가 싶어 사람이 없는 사무실을 둘러보며 자원 2팀까지 걷다가 돌아왔을 땐 책상에 몸을 떡 하니 기댄 채 팔짱을 끼고 나를 바라보는 한석율이 있었다.


 “장백기.”

 “아니, 왜 남의 자리에…!”


타박을 주려던 나는 도통 찾아보기 힘든 그의 진지한 표정에 말을 멈추고 빤히 바라본다. 평소라면 애완견처럼 옆에 붙어 백기 씨, 밥은 잘 먹었어? 하며 안부를 물었을텐데 그를 둘러싼 공기가 가라앉아있다. 장백기- 어쩐지 여운을 남기듯 다시 한 번 부르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대답한다.


 “왜요…?”

 “애인 생겼어? 아님 만나는 사람 있어?”

 “본인이 모르는 애인도 있습니까?”

 “오늘 일찍 퇴근해야 한다며. 이런 날 일찍 퇴근해야 하는 이유가 뭔데?”


어안이 벙벙해져 되묻자 눈빛을 조금 누그러뜨리며 추궁한다. 그제야 내가 아…하며 오전의 메신저 대화 흐름을 떠올리자 고개를 바싹 붙여온다. 다가오는 모습이 짐짓 심각해 풋 웃음이 터지고 만다. 점심식사 후 흡연시간이나 티타임이 가장 즐겁다던 자칭 섬유팀의 감성미남은 겨우 저걸 물어보려고 여기에 와 분위기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모습은 처음이라 좀 놀려줄까 싶어 입을 열 듯 말 듯 망설이며 시간을 벌수록 다급한 표정 위에 처연함이 짙어진다. 순간 닮은 점이라고는 없는 얼굴에서 익숙함을 발견한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장황하게 해명을 늘어놓고 있었다.


 “일단 한석율 씨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닙니다. 애인 있단 소리는 한 적도 없습니다. 넘겨짚지 마십시오. 금요일 밤에 칼퇴하고 싶다는 게 뭐 큰일입니까?”

 “아… 그런 거야? 겁 먹었잖아. 

 “그게 겁까지 먹을 일입니까? 그거 물으러 왔어요? 

 “내가 욕심이 많아서. 내 동기 누구한테 뺏기나 싶어 화가 났ㅈ….”


앉아, 앉아~ 백기 씨 자리잖아. 어색하게 말끝을 흐린 한석율은 이내 너스레를 떨었다. 안도의 웃음을 머금고는 나를 슬쩍 의자에 앉히며 팔로 내 어깨를 조심스럽게 톡톡 두드린다. 무거운 공기를 거둬낸 그는 평소의 기조로 돌아와 허기를 채운 앵무새처럼 조잘조잘 떠들기 시작했다.


 “사실 밤에 솔로들끼리 한 잔 하려고 했지.”

 “어차피 둘 뿐이잖습니까. 밸런타인데이에 혼자 술마시는 게 싫어서 그렇게 야단법석을 떤 겁니까?”

 “안 그래도 이렇게 외로운 날, 알 거 아는 사람들끼리 왜 이래~ 그래서 장백기도 콜?”

 “별 일 없으면요. 상황 봐서 문자할게요.”


만약에, 아주 만약에… 오늘 목표를 달성한다면 퇴근길을 함께 하는 사람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건 일단 숨긴다. 크리스마스나 밸런타인데이에 애인이 없는 무료함을 즐기려고 노력하려는 나와는 달리 한석율은 이런 날에 혼자 있는 걸 죽기보다도 싫어했다. 남자친구라도 생긴 건지 언젠가부터 저녁에 모이기가 힘들어진 안영이와 야간 대학교를 다니느라 바쁜 장그래가 빠진 동기 모임은 한석율과 둘이 맥주잔을 기울이며 가벼운 속얘기를 찔끔 털어놓다가 파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 나 이따가 퇴근할 때 내려온다?”

 “벌써 갑니까?”

 “헉∼ 우리 백기가 나 가는 거 아쉬워하는 거야? 이러면 더 있고 싶어지는데... 그랬다간 사수의 탈을 쓴 싸이코패스 성준식이 우리의 만남을 허락치 않을 거야, 흑흑.”


입술을 비죽 내민 한석율이 양 눈꼬리를 한껏 내리고 우는 시늉을 한다. 한두번 저러는 게 아닌데도 볼때마다 저 익살에 입꼬리가 올라간다. 내가 한석율 같이 애교 많고 붙임성 좋은 후배였다면 강해준에게 지금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을까 아무 쓸모없는 가정을 할 때도 있었다.


 “사실 점심 전까지 끝냈어야 하는 일이 있는데 나와 내 동기의 안녕을 확실히 하고 싶었어. 공장에서 전화 기다리고 있어서 먼저 올라가봐야 해.”


오후에도 일 잘 하고, 해피 밸런데이데이! 하며 손바닥을 입술에 갖다댄 한석율은 환하게 손키스를 날리곤 룰루랄라 콧노래까지 부르며 사라진다. 구내식당 메뉴만큼이나 기분이 들쭉날쭉한 한석율이 빠져나간 사무실은 다시 조용했다. 커피를 타 와서 기획안 자료를 검토하는 사이 하나 둘씩 사람이 들어차기 시작하더니 어느 덧 12시 49분. 책상 위를 부유하던 내 시선이 행선지를 바꾼다. 유리문을 가르고 들어올 인영을 기대하기가 무섭게 반듯한 걸음소리가 들려오면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인다. 머스크 향과 함께 미풍을 일으키며 자리에 앉는 사수의 옆얼굴은 오늘 유난히 단정하다. 업무를 시작하면 무섭게 집중하는 성향을 익히 아는 지라 마음이 급했다. 손을 뻗어 쇼핑백을 쥐고 일어서 그의 의자 옆에 선다. 저기, 대리님… 하는 망설임이 잔뜩 묻어있는 말끝에 강해준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네, 하고 말을 받았다.


 “오늘 일찍 가 봐야 합니까?”


먼저 불러놓고 입을 떼지 못하는 내 초조함을 감지한 그가 먼저 묻는다. 항상 강해준 앞에서만 태업 벌이는 뇌세포들이 의외의 질문에 아예 파업을 선언한다. 아이, 데이트가 있겠죠. 뒤에서 장난스런 목소리를 내는 홍 대리님의 익살에 신다인 씨가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 아뇨, 저… 그것보다 이거...”


무딘 소리를 내며 손을 방황하다가 그의 정면 책상 위 빈 공간에 슬쩍 작은 쇼핑백을 내려놓자 키보드 두드리는 리듬이 불규칙해진다. 겸연쩍게 서 있는 나를 향해 몸을 돌린 강해준은 예의 그 표정이다. 무엇을 원하냐고 묻듯 올려다보는 직선적인 눈빛에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절절 매고 있는 내가 반사된다. 대답을 기다리는 느긋한 시선에 아까부터 열심히 연습한 멘트가 무엇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맛있게 드시고… 드시고…… 입술만 달싹이던 나는 익숙하게 그의 시선을 피한다. 황망함을 지우지 못한 그의 입가로 눈을 옮긴 나는 입을 열지 못하고 미소만 짓는다. 보고서를 검토하듯 감정이 담기지 않은 눈으로 그 모든 과정을 살피던 기다리지 못하고 입을 뗀다.


 “고마워요.”


그 한 마디에 잘게 떨고 있던 몸에 긴장이 풀려 표정변화를 숨기려 어색한 목례를 한다. 몇 번을 들어도 깊이 날아와 박히는 목소리의 울림이 깊은 곳에서부터 몸을 떨게 만들었다. 일주일 전부터 백화점 지하 식품부에 들러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초콜릿을 찾던 때와는 다른 설렘에 몇 걸음 안 되는 자리까지 스텝이 무너질까 나는 발끝에 힘을 주고 걷는다.


자리에 앉은 나는 아까부터 작성 중이던 기안서에 사력을 다해 집중하는 척 한다. 혹여나 강해준이 나의 부주의함을 눈치채고 의심을 품지 않도록. 엑셀로 바쁘게 숫자를 정리하고, 표를 만들어가면서도 신경은 온통 다른 곳을 향해 있다.


 “장백기 씨, 기획안은 어디까지 진행했습니까?”

 “오늘 저녁까지 완성해서 올리겠습니다.”

 “그럼 지금 완성된 부분까지 프린트해서 옥상으로 올래요?”

 “예, 금방 가겠습니다.”


적당히 차분한 자세를 유지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내 미묘한 변화를 눈치챈 걸까? 초조함에 입술로 타이핑을 하던 손가락을 가져가며 되짚어본다. 인쇄 설정을 누르고 탕비실로 향하면서 힐끗 쳐다본 옆자리는 이미 비어있었다. 짧은 시간 안에 작성한 것 치고는 나름 설득력 있게 기획했다고 자평하는 보고서를 뽑아들고 회의실로 지나치던 나는 또 다시 물음표를 띄운다. 왜 옥상으로 오라는 걸까? 둘 사이 업무 얘기가 오갈 때면 같은 층에 위치한 소회의실을 애용하는 강해준이 오늘은 무언가 달랐다.


▼ ▲ ▼ ▲ 


옥상에 다다르자마자 담배를 태우고 있는 뒷모습이 보인다. 햇빛으로 받고 있는 탓에 담배를 들고 있지 않은 손을 이마 위로 가져대며 그늘을 만든 강해준은 내 기척에 피우던 꽁초를 비벼껐다. 


 “..왔군요.”

 “네, 요청하신 기획서 초안입니다.”


내미는 문서를 받아든 그가 첫 장부터 펜으로 주요사항을 체크하며 미간을 좁혔다. 나는 그 모습을 초조하게 지켜본다. 이제 익숙해질 법도 한 과정이건만 이 남자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특별한 의미로 다가와 나를 바짝 긴장시켰다.


 “전반적인 분석 절차는 좋습니다. 국내 생산량은 아마 작년에 이 수치를 초과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한 번 찾아보세요.”


고개를 들자마자 종이를 짚어가며 전달하는 말을 빠짐없이 수첩 위에 빼곡하게 옮겨적는다. 비즈니스 모델의 수익성과 위험성을 평가하는 강해준의 언어에서는 실적 1위에 걸맞는 타고난 분석가로서의 통찰력이 반짝인다.


 “…활용 부분에는 이스라엘 방산업체 쪽의 신규 수요를 보충하면 사업성을 더 높이 평가받을 수 있을 겁니다.”

 “네, 대리님.”

 “이 정도면 최종까지 무난하게 승인 받을 것 같네요.”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내내 긴장으로 굳었던 얼굴이 펴져 바보 같이 히죽거리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처음 분석 보고서를 내밀었을 때 빨간 선으로 잔혹하게 난도질 당한 문장들과 전달 방식의 문제를 한 시간 내내 지적당하던 것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잘 이끌어주신 덕분에요.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이던 나는 문득 목이 허전해 우리가 추운 바람을 맞으며 불편한 자세로 서서 기획서를 검토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대리님, 그런데 왜 굳이 회의실이 아니라 여기로….”

 “따로 할 말이 있어서 나온 겁니다.”


의외의 문장에 나는 발끝에 머무르던 시선을 올려 확인하듯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꼭 필요한 말만 하는 남자다. 업무와 관련된 게 아니라면 하루에 주고 받는 말이 열 마디가 되지 않는 날도 허다했다. 그런 사람이 사무실을 벗어나 할 말이 무얼까. 나는 표정 변화가 없는 정갈한 얼굴을 스며시 곁눈질하며 자세를 가다듬는다. 오랫동안 이런 식으로 그를 몰래 탐하며 던져왔던 물음에 대한 대답을 듣게 될지도 모르는 찰나였다. 


어쩌면 혼자가 아니게 될 밸런타인데이는 외롭지 않을 지도 몰라. 뇌리를 스치는 탐욕스러운 생각과 함께 무겁게 내려앉는 시선에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탐 (貪) #1 끝. 




석율백기 해준백기 석율백기해준 해준백기석율 해백율 율백해 해백율백해 해백 율백





Comments:  설 연휴 끝에 밸런타인데이 소재를 들고 오자니 민망하네요. 오래 붙잡고 있던 글입니다. 

제 세상은 삼각형인가봅니다. 뾰족해서 찔리고 아파도 트리플!!!! 해백율!!!!!


넘치는 피드백을 먹고 (변화는 없지만) 새 다짐은 열심히 합니다. 감사합니다. #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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