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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 해준백기석율 (해준백기~석율백기) 트리플.
PC 혹은 Soundcloud 지원 환경에서 BGM과 감상하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철벽(디나이얼)과 개벽(오픈) 사이의 어떤 장벽(클로짓)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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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I)
“야야야, 축하주가 이게 뭐냐, 철강팀 에이스는 쇠도 마시고 그러는 거 아냐?”
한 해의 끝을 마무리하는 자리에서 오가는 화제는 여럿이었지만 단연 많은 이들의 관심은 새해 인사이동에 쏠려있었다. 그 중에서도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던 건 강해준이었다. 서른 셋, 초고속 승진, 입사 8년차 철강팀 과장. 동기들과 직속후배가 주축이 된 사실상 해준의 승진 회식에 가까웠고, 축하의 말이 쌓이는 만큼 해준의 책임도 한층 무거워졌다.
“강 과장, 겹경사네?”
제가 승진한 것도 아닌데 뭐 그리 기분이 좋은지 성준이 벙글거리며 입을 뗀다.
“왜 말 안했냐?”
“뭘.”
“새해에 너 아빠 된다며. 지호 씨한테 들었어.”
우오∼ 흡사 방청객의 반응을 보듯 감탄하던 무리가 이내 너도나도 몰려와 해준의 술잔을 채우기 바빴다. 그 덕에 백기는 자연스레 테이블 끝쪽으로 밀려났다. 모두가 축하하는 자리에서 자신만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너 닮은 딸 낳으면 무서울 것 같은데 제발 제수씨 유전자가 강했음 좋겠다.”
“아니, 이 새낀 즐거운지 어쩐지 표정이 없어. 대리 승진 때는 어려서 그랬다쳐도 지금은 꼬장도 부리고 그럴 때 아니냐?”
그 말인 즉, 해준의 곁에 백기가 더 이상 버티고 있을 자리가 없다는 걸 의미했다. 머리를 쪼개는 듯한 두통과 구토감이 밀려왔다. 석율과 상담치료를 시작한 1년 간 사라진 줄만 알았던 증세였다. 당황한 백기가 입을 틀어막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서 화장실로 향했다. 기어이 눈물 줄기가 입을 가린 손등을 타고 흘렀다.
‘그 사람한테 마음 돌려받으려고 사랑한 건 아니잖아.’
몇 번이고 자신을 다독이던 석율의 위로가 귓가를 맴돌았다. 알아요,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인 거. 백기는 체념하듯 변기 앞에 주저앉아 눈물과 토사물을 뱉어냈다.
‘백기 씨, 끝내는 게 두려워?’
‘버려지는 게 두려운 거 아냐?’
‘선택은 장백기가 하는 거야. 버려지느냐, 버리느냐의 문제라면.’
오랫동안 보내길 주저하던 관계의 끝을 알리는 신호가 석율의 목소리와 뒤섞여 어지럽게 백기를 괴롭혔다.
▼ ▼
“강해준은 이상해, 진짜 이상한 놈이야…요기 딱! 선을 그어놓고 그 위론 이-러어-엏게 두터운 벽을 쌓고 다가가지도 못하게 하는 것 같단 말야. 어떻게 같이 살지?”
한바탕 정신없는 회식 끝에 남은 건 해준과 동식 뿐이었다. 올해도 결혼이라는 벽을 넘지 못한 동식의 푸념을 듣는 것이 해준의 남은 과제였다. 동식의 말을 빌리자면, 강해준의 특이한 결혼관과 결벽증에도 불구하고 순조롭게 진행된 해준의 결혼은 순풍을 타듯 여름쯤 태어날 아이까지 종합선물세트로 가져온 셈이었다.
두고 봐,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장백기도 널 이상하다고 생각할 걸? 끝이 나지 않는 해준의 비정상에 대한 논의는 지호의 동창을 소개시켜 주겠다는 약속이 있고서야 마무리되었다.
자신을 술을 먹은 건지, 술이 자신을 먹은 건지 모를 난리통 속에서 냉정을 찾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어느 순간부터 장백기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을 몰아가느라 바빴던 동기들 중 누구도 백기가 어떻게 사라졌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걔 술 잘 못한다며. 아까 슬쩍 빠져나간 거 아냐?’
‘애인 있으면 그럴 수도 있지. 연말이잖아. 넌 연말에 우리랑 있고 싶겠냐?’
아냐, 성준과 준식이 심드렁하게 말했지만 해준은 고개를 저었다. 3년 간 같이 술잔을 기울인 경험은 손에 꼽았지만, 해준이 있는 자리에서 인사 없이 먼저 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백기의 이름을 찾았다. 전화를 걸까 하다가 상단에 걸린 시계를 보고 멈칫한다. 오전 1:45. 3년이나 알고 지낸 직속 후배지만 10시 이후로는 전화하기가 망설여지는 상대이기도 했다. 그러나 해준은 그의 불안한 눈빛을 상기했다. 자신의 승진 소식에는 누구보다 환하게 웃어보이던 백기는 아내의 임신소식을 듣자마자 표백된 듯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봤었다.
그 얼굴을 지우려는 듯 해준은 꾹 버튼을 누른다. 건조한 통화연결음이 해준의 초조함을 부추겼다. 무엇이 그리 속상했던 걸까? 지호가 성준에게 먼저 임신 소식을 알린 것? 자신의 입으로 직접 알리지 않은 것? 그 순간 백기의 음성이 꼬리를 무는 물음표를 갈랐다.
[……네.]
“장백기 씨, 어딥니까?”
[……화장실…]
“기다려요.”
목소리가 다 갈라진 채 전화를 받은 백기는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급히 전화를 끊고 화장실로 들어간 해준은 백기의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휴대폰을 쥔 손, 작지 않은 몸을 엉망으로 구긴 채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아 무릎 사이로 얼굴을 묻은 저 남자. 언제나처럼 오전 7시 30분이면 자리에 앉아 자신을 기다리던, 네이비 색의 수트와 이마를 덮은 앞머리가 잘 어울리는 철강팀의 기대주.
자신을 만난 후, 그의 인생은 갈피를 잃었다.
해준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백기의 맞은 편에 쪼그려 앉았다. 자신이 온 것도 모르는 지 여전히 미동이 없는 백기의 뒤통수를 두어 번 쓰다듬은 후, 조용히 말을 건넨다.
“장백기 씨.”
“…….”
“일어나봅시다.”
그제야 해준의 기척을 느꼈는지 부스스 고개를 드는 백기의 얼굴이 엉망이다. 머리에 말라붙은 토사물의 흔적, 눈물자욱이 가득한 얼굴과 부르튼 입술. 그것보다 해준을 괴롭히는 것은 서서히 눈을 마주해오는 백기의 눈동자였다. 차가움을 가장하지 않을 때면 어떤 감정을 품는지 숨기지 못하는 투명한 눈이 자신의 열정을 갈구하고 있다는 걸, 해준은 모르지 않았다.
“…강 대리님.”
자리를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본능처럼 스쳤지만, 해준은 백기의 눈빛에 포박당한 듯 움직이지 못했다.
“저는, 신이 정말 원망스러워요.”
“많이 바라지 않았잖아요… 신이 저한테 해준 게 뭐에요.”
백기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비수가 되어 꽂힌다. 정작 그가 미워해야 할 사람은 나인데, 백기는 아이처럼 애꿎은 신을 탓한다.
“대리님을 만나지 않게 하던가, 대리님이 결혼하지 않게 하던가, 대리님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던가.”
타인이 들으면 저주에 가까운 소리를 쏟아냈다. 늘 고요했던 들판에 천둥이 하늘을 가르고 먹구름이 몰려와 비를 쏟아내듯, 멈추지 않고 흐느껴 운다. 해준은 백기가 다시 자기 얼굴을 감싸며 무너지는 꼴을 가만히 바라보다 구두끝을 보았다.
이럴 때면 해준은 꼼짝없이 그를 안아주고 싶었다.
▼ ▼ ▼
다시 까무룩 지쳐 잠이 든 백기를 업고 방황하던 해준은 택시를 잡아탔다. 한번 밖에 가보지 않은 백기의 집이지만 위치만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택시가 떠들썩한 연말의 밤을 달리는 동안 해준은 자신에게 기댄 백기가 품은 감정의 무게에 대해 생각했다. 파티션 하나를 두고 수없이 오가던 불안한 시선과 자신을 부르기 전 늘 3초쯤 망설이는, 조심스러운 부름. 자신의 결혼식에서 ‘행복하세요.’라는 덕담을 건네며 우는 듯 웃던 백기를 두고 준식은 지호가 백기의 숨겨진 첫사랑이 아니냐며 당황스러워했다.
상념에 잠긴 해준을 깨우듯 주머니 속 휴대폰이 잘게 떨었다.
[지호: 해준 씨, 늦는다더니 아예 안 들어오는 거야?]
[지호: 피곤해서 먼저 잘게~ 너무 과음하지 말고 와. 사랑해♥]
다정한 메시지와 지호의 웃는 얼굴이 걸린 프로필 사진에 해준은 숨이 막혔다.
[강해준: 잘 자, 내일 보자.]
결국 차창을 열고 찬바람을 맞는다. 네 살 어린 신입이 자신의 위치를 못 찾고 방황하고 있을 때 즈음, 해준은 지호를 만났다. 두 살 많은, 차분하고 이해심 많은 여자. 세 번째 만남에서 해준은 지호와 결혼을 결심했다. 이 여자라면 잘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계획대로 만난 지 1년 만에 성공적으로 결혼이라는 목표를 달성한 해준은 철벽같던 그 믿음에 균열이 가는 것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백기가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파동을 일으킬 때마다 해준은 실체 없는 믿음이 허물어져 가는 기분이었다. 어느 시점인가 급속도로 기류가 달라진 부사수의 감정을 눈치채고 나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기대선 벽이 덜컹거리는 순간은 예상 외로 자주 찾아왔다. 여전히 어른스럽지 못한, 네 살 터울의 정제되지 않은 감정이 형상화되는 시점은 때때로 위험했고, 해준의 가치관을 현혹시켰다.
이윽고 백기의 집에 다다랐을 때, 해준은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거절의 의사표현을 확실히 할 참이었다. 몇 번이고 백기를 따로 불러 견고하게 벽을 쌓으려고 시도했으나, 매번 ‘내일 봅시다’ 따위의 인사말로 대체해버린 그 끝맺음을.
침실에 백기를 눕힌 채 소파에 앉아 한참동안 적당한 말을 찾던 해준은 술에서 깬 지 오래였다.
“...강 대리님...”
백기는 무의식 속에서도 저를 찾았다. 내년이면 듣지 못할 부름. 문득 그런 것들이 그리워질 수도 있겠다는 모순적인 생각에 해준이 자조적으로 웃었다. 연민은 곧 해준의 발을 묶는 족쇄가 되어 침대에 걸터앉아 백기의 잠든 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게 했다. 어디론가 쏟아질 것만 같은 마음을 잘라내는 일을 해가 지나기 전에 꼭 해야만 한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다. 장백기의 서른이 보상받지 못하는 마음과 구원해줄 수 없는 구애로 인해 설움으로 물드는 걸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의 마음까지 책임지기에는 해준은 이제 진 짐이 너무 많았다. 과장의 직책이 주는 직장에서의 기대, 외아들로서 부모에게 해야할 도리, 남편으로서의 의무와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의 자질…. 그 척박한 짐들 사이 백기에게 내어줄 틈은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마음의 틈을 비집으며 백기에게 전할 말을 헤아리던 해준은 잠이 들었다.
꿈에는 싱그러운 얼굴을 한 백기가 나왔다.
“대리님, 나랑 자요.”
해준에게 다가온 백기의 눈은 벌어진 상처에서 나는 핏기보다 새파란 열정과 욕망이 빛났다. 자신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순수한 열망에 다시금 마음의 벽이 허물어지는 것을 느끼며,
“마지막으로 한 번만 허락해주세요.”
해준은 대답 대신 마른 침을 삼켰다. 방금 전까지 혀 끝으로 굴리던 말의 조각들로 그를 끊어내야만 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평소와 달리 망설임 없이 다가오는 백기의 입술이 뜨거워 데일 것 같았다. 격정에 휘말려 자신도 함께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해준은 눈을 감았다.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인사가 될 것이다.
벽 I 끝.
Comments: 해백율 트리플 달아놓고 석율이 목소리만 등장하는 전개ㅠㅠ
제가 사랑하는 성뉴리는 다음 편부터 목소리나 회상이 아닌 실체로 등장합니다.
읽다보니 백기해준 같아서... 오예하지 마세여...강 대리는 백기한테 정신까지 탈탈 흔들리는 것뿐ㅎㅎ
+ 20150108 : 백기 메인의 썸네일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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