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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Fluid Fantasy

[해준백기석율] 벽 II

멜티드 2015. 1. 3. 15:37






Note: 해준백기석율 (해준백기~석율백기) 트리플

PC 혹은 Soundcloud 지원 환경에서 BGM과 감상하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철벽(디나이얼)과 개벽(오픈사이의 어떤 장벽(클로짓)에 대하여.

─ 






                    벽, (II)       






 




방은 텅 비어있었다. 해준의 흔적이 남아있는 건 쓰레기통 속에서 점액질을 가득 머금고 있는 콘돔과 포스트잇 한 장 뿐이었다. 


[실수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정갈하게 쓰여진 글씨가 백기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조용히 몰아치던 밤의 기억. 해준은 그것을 ‘실수’라 칭했다. 사각 포스트잇을 쥔 백기의 손이 떨렸다. 


지난 새벽, 해준과 잤다. 


주어야 할 마음, 정확히 말하면 몸까지 모두 준 셈이었고, 강해준은 그 중 어떤 것에도 대답하지 않으리라는 걸 이제는 안다. 사랑해서는 안 되는 사람. 나에게 사랑을 내어줄 수 없는 사람. 지난 2년 6개월 간 매순간 그 사실이 변하지 않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출근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동침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으로 끝이라는 걸 인지했을 때는 그저 허탈했다. 해준과 성적 욕망을 결부시켰을 때면 의례 나타나던 증상들조차 발현되지 않았다. 정신은 믿을 수 없을만큼 말짱했다.




해준과 처음 하게 되면 감격스러우리라고 예상했다. 셀 수 없으리만치 많은 날을 해준이 다가와 키스하는 상상을 했다. 그런 백기를 벌 주듯 깨고 나면 혐오감과 두통이 따라붙었다. 강해준이 그럴 리가 없다는 걸, 백기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혈기가 앞서 감히 해준의 마음을 확인하려 든 적도 있었다. 감정의 실체를 확인한 순간부터 백기는 자신을 이렇게 괴롭히는 것이 외사랑이라는 걸 납득하지 못했다. 가끔은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아웃팅에 대한 두려움보다 크게 백기를 짓눌렀다.


기회를 잡은 건 설상가상으로 백기의 실적과 자아개념이 엉망으로 무너지던 시점과 일치했다. 그 무렵의 백기는 매일 같이 계속되는 자기혐오와 해준에 대한 알 수 없는 욕구가 뒤범벅이 되어 하루하루 말라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준이 설정한 높은 벽을 넘으려 전력을 다하는 백기를 눈여겨 본 팀장은 신규 사업 담당을 제안했다. 시행 전까지도 세밀한 기획과 수익성 측면에서 극찬을 받으며 팀의 기대를 모았던 말레이시아 철강 수출 프로젝트는 갑작스러운 반덤핑 조치로 백지화되었고, 동시에 백기도 처참하게 바스라졌다.


목숨과 같았던 자존심과 자신감을 잃은 백기는 자신의 불운을 이용했다. 해준이 흘끔 자기를 바라보는 일이 많아졌다는 걸 자각하는 때면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그 시선을 오래 붙잡아둘 수 있는지를 궁리했다. 실패를 핑계삼아 백기는 가끔 해준과 바람을 쐬러나가 담배를 무는 그의 옆모습 따위를 실컷 감상하거나 단둘이 술잔을 기울이는 일을 만들기도 했다. 



“대리님은 저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해준이 마시던 맥주를 바라보며 백기가 조심스레 묻자, 해준은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좋다, 싫다의 범주에서 대답해야 합니까?”

“아… 꼭 그런 건….

“나는 장백기 씨가 싫은 게 아닙니다. 가끔은 나를 닮았다고도 생각합니다. 지지 않으려고 애쓸 때나 자기자신을 이기지 못하는 모습을 볼 때면 백기 씨가 어리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나도 신입 땐 그랬으니까.”

“네.”

“자주 무리하는 거 알고 있습니다. 나는 백기 씨가 주어진 업무를 완벽하게 해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좋아합니다.”



일에 집중한 백기 씨의 모습을 바라보다 자료를 전달할 이메일 주소를 잘못 기입하는 실수를 한 적도 있습니다. 의외의 고백에 백기는 눈을 빛내면서도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그것을 못본 척 해준은 뒷말을 이었다.



“다만, 장백기 씨가 좀 더 자기 자신을 아끼는 법을 알았으면 하는 때가 있습니다.” 

“…”

“오늘 같은 일은 생각보다 빈번하게 발생합니다. 2년차에겐 감당하기 힘든 일이란 거, 압니다. 그치만 장백기 씨처럼 그렇게 자신을 혹사한다면 오래 버틸 수 없을 겁니다.”

“네, 대리님.”



해준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백기의 얼굴을 훑어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최근 몇 달간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사람 같다는 거, 본인은 압니까?”



백기는 다정하게 상태를 묻는 해준의 낯선 시선에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는 자신이 두려웠다. 이렇게 자신을 자상하게 대하는 해준을 보면 자꾸 기대고 싶어질 거고, 그걸 해준이 알아채는 순간 철처럼 차갑게 굳을 그의 변화가 백기를 매일 같이 공포로 몰아넣고 있었다.


그런 자신을 아는 지 모르는 지 눈을 맞추며 우려를 표하는 강해준의 표정을 담으며 백기는 울컥 올라오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웁니까?”

“대리님…….”



댐이 터지듯 왈칵 울음을 쏟아내는 백기에 해준이 당황스러워 했다. 그 틈을 타, 백기는 천천히 해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혹여 눈물이 그의 반듯한 정장을 얼룩지게 할까 조심스러워 하는 자신을 비웃으면서도 백기는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갈까 목놓아 울지도 못했다. 해준의 손이 천천히 자신의 등을 감쌌다.


장백기 씨는 아직도 어리군요. 낮게 귓가를 울리는 음성이 백기를 전율케 했다. 해준이 천천히 등을 토닥이며 위안을 주려 애쓰는 동안 오히려 신체의 온 감각이 날뛰는 통에 백기는 눈을 감았다. 볼에 닿는 해준의 품과 그의 언어, 목소리, 손길, 냄새, 감각을 놓치지 기억하기 위해 애태우며 태어나 처음으로 신을 찾았다. 절대 이 행복이 깨지지 않도록 자비를 베푸소서.


해준이 자리를 털고 일어난 후에도 그 밤의 기억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백기에게 생경한 감정과 감각들을 일깨웠다. 해준에 대한 기억으로 수음을 할 때면 정신이 아득해지는 성적 희열을 느꼈다. 그런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금세 희열을 덮었지만 해준에 대한 마음은 손쓸 새 없이 커지기만 했다. 와닿는 현실은 지독했다. 회사에선 여전히 차가운 벽과 같은 해준을 마주해야 했다. 다정함에 대한 기억이 주는 행복은 해준의 결혼식 소식에 산산이 부서졌다.



샤워 후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며 과거를 회상하던 백기는 이내 수건으로 머리를 털었다. 월요일 아침, 얼굴을 마주할 해준과의 관계를 끝낼 용기가 필요했다. 드라이어로 머리를 헤집는 손길이 제법 바빠졌다. 석율을 만나야 한다, 온통 그 생각 뿐이었다.





▼ ▼ ▼

‘그러니까 백기 씨는 그걸 신호탄으로 삼으면 되는 거야.’


해준이 청첩장을 돌리던 날부터 백기는 본격적으로 신경정신과를 찾았고 그들이 결혼식을 올린 후에는 주치의의 조언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자신을 삶의 우위에 두고 자신의 행복과 안위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기로. 스물 여섯, 입사 전의 장백기는 그런 인간이었다. 모든 게 자기중심적이고 어떠한 파동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 그래서 자신보다 배는 견고한 해준을 마주했을 때 겪는 부대낌이 자신을 닮은 이에 대한 방어기제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색다른 감정으로 피어오르는 순간을 자각하면서부터 백기는 자신이 비정상적인 존재라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이전 연애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심장의 떨림이나 감정의 파동은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계절이 두 번 바뀌는 사이 자기혐오와 해준에 대한 생각들로 정상적인 삶의 영역을 잃어가면서 백기는 신경정신과를 찾았다.


고심 끝에 명문대 출신의 가장 온화로운 얼굴을 한 여의사가 있는 병원을 골랐다. 이 사람이라면 이해해줄 지도 몰라, 하는 애처로운 바람도 있었다. 발을 들이기 무서워 주위를 서성이다 병원의 불이 꺼지는 모습을 보기도 했고, 문 앞까지 갔다가 발을 돌려 나온 적도 있었다. 그날도 그랬다. 아침부터 계속된 구토로 오전 병가를 낸 백기는 병원 앞에서 몇 분째 발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오후 출근시간까지 남은 시간은 세 시간. 퇴근 후와는 달리 돌아갈 시간이 정해져있다는 사실이 입구까지 걸음을 부추겼다. 



“지금 진료 가능한가요?”

“네, 대기없이 진료 가능하세요.”

“저… 여자 선생님으로 부탁드립니다.”

“잠시만요…”



스물 둘, 혹은 셋. 앳되어 보이는 접수원이 모니터를 확인하고 백기에게 입을 떼려다 자기 너머의 누군가를 보고 있었다. 백기가 자연스레 시선을 따라간 곳에는 입 모양으로 ‘나, 나, 나!’ 를 외치며 자기 가슴팍으로 향해 양 손의 엄지를 내리꽂으는 이가 보였다. 굵은 컬의 5:5 가르마, 장난스레 웃는 얼굴, 흰 가운 안으로 보이는 핑크색 셔츠. 굳이 저런 행동이 아니더라도 시선을 끄는 사람이었다. 백기는 접수원의 대답을 기다리며 돌아섰다.



“주 원장님은 앞으로 한 시간 정도 예약 환자가 있으셔서요. 대신,”



난처하게 입을 떼는 접수원을 바라보며 뒤돌아 나갈까를 고민하는 백기의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말을 받았다.



“제가 봐드리고 싶은데.”

“…”

“한석율입니다. 서울과학고 조기졸업, 서울대 신경정신과 수석 졸업, 동 대학병원 신경정신과 최우수 전공의상 수상, 대한민국 정신의학과 전문의 중 최연소로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에 논문 등재.”

“…”

“어때요?”



석율의 뻔뻔한 얼굴에 어린 접수원이 쿡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와 달리 유독 사회적 평판과 권위에 약한 백기를 꿰뚫듯 줄줄 자신의 약력을 읖는 젊은 의사에 마음이 조금 기우는 것 같기도 했다. 백기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180도로 휙 돌아 윙크를 날리며 ‘이 분 차트 좀!’ 하고 자신을 끌어당기는 의사 탓에 백기는 홀린 듯이 진료실에 입장하고 있었다.





▼ ▼ ▼ ▼

석율은 예약환자가 없는 틈을 타 잠시 눈을 붙이러 갈 참이었다. 통찰력이 남다른 석율이 자신을 따라 정신의학과 교수로 남길 원했던 모교 주임교수는 틈이 날때마다 석율을 불러내 내담자에 대해 토의하기를 즐겼다. 몇 달 전, 함께 논문을 발표하고 싶다는 제안에 석율은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아, 잠을 덜 자서 그런가… 이게 다 욕구를 제때 못 풀어서 그래. ‘그 남자’의 것이 분명한 뒷모습을 아침부터 마주했을 때, 석율은 눈을 두어번 비비며 입을 삐죽거렸다. 


‘내담사유도 꼭 기입해야 합니까?’


진짜야? 결국 왔네? 뭐야, 운명이야? 피곤으로 찌든 얼굴이 놀라움으로 물든 석율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일주일 전, 진료시간이 끝날 무렵 가운을 벗고 셔츠 매무새를 정리하던 석율의 시선이 창 밖의 인영에 머물렀다. 초겨울에 수트 하나만 걸치고 있어 안쓰러운 마음이 들던 참이었다. 건물 앞에서 얼마나 오래 서성이고 있었는지 바람을 맞은 얼굴이 붉었다. 불가항력에 가까운 감정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정신을 감정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꼭 저런 얼굴을 하고 만다. 에휴, 저분은 또 무슨 고민이십니까- 하며 말끝을 늘이던 석율이 술자리에서 자신을 찾는 주임교수의 연락에 급히 시선을 거두고 진료실 불을 껐다. 주차장에서 빠져나오던 석율은 여전히 건물 앞에 서서 망설이는 남자의 얼굴을 관찰한다. 큰 키가 돋보이는 하얀 얼굴에 무테안경 속 떨리는 눈동자, 고집있어 보이는 입술이 예뻤다. 어... 내 타입인데? 불이 꺼진 병원을 바라보는 남자의 깊은 절망만이 그 주변을 감쌌다. 한참을 주차장 입구에서 정차한 채 남자를 감상하던 석율이 뒷 차의 클락션 소리에 혀를 쯧, 차고 액셀을 밝았다.


망설이지 말고 얼른 와요, 저런 얼굴을 하면 별도 따다주겠네. 혼잣말과 함께 멀어진 석율 앞에 일주일 전 그 남자가 와 있었다. 



[이름: 장백기, 나이: 29세, 가족관계: 1남 중 외아들, 직업: 회사원(종합무역상사 근무), 내담 사유:       ] 


어쩌자고 정신과까지 온걸까. 불안하게 진료실을 관찰하는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백기의 방어적 기질을 짐작한 석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기까지 많이 어려웠던 거 알아요.”

“….”

“나를 믿고 마음을 열면 상처는 깨끗하게 봉합해줄게요.”



눈을 맞추며 조용히 미소짓는 얼굴에 자신감이 깃들어있었다. 백기가 석율과의 첫 진료를 잊지 못하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심리검사 결과지를 받은 석율이 건넨 말과 눈빛이 너무 따뜻해서. 두번째는 줄줄 욀 정도가 된, 난상토론에 가까웠던 면담 때문이었다.



재수없더라도 전문가로서 진단을 내려도 괜찮겠죠? 물론 아직 내가 백기 씨를 잘 모르니까 이 데이터에 기반해서.



결과지를 살랑 흔들며 양해를 구한 석율이 네, 뭐… 하는 어색하게 대답하는 백기에게 슬몃 미소지었다. 이어지는 말은 불편했다.



“백기 씨는 지금 심각한 자기혐오감과 불안, 수치심, 죄책감에 시달리는 걸로 파악되네요. 보통 이런 증상의 원인은 동성애를 자각한 사람에게 흔하게 나타나는데, 맞나요?”

“아마도….”

“동성애 자체는 병이 아니에요. 원하는 게 성 정체성을 뒤집는 거라면 어떤 의사라도 치료 못합니다. 하지만 백기 씨처럼 정신적, 신체적 적응장애를 겪는 걸 고치는 건 제 소임이죠. 정신의학에서는 동성애자를 크게 두 부류로 나눕니다.”

“…….”

“자아가 그 사실을 용납하는 경우와 그렇지 못한 경우. 참고로 저는 전자에 해당되고, 백기 씨의 경우는 후자겠죠.”



의외의 상황에서 태연하게 커밍아웃을 하는 석율을 앞에 둔 백기는 기가 막히다는 듯 허, 하고 바람빠진 소릴 냈다. 당신이 그렇게 얘기할 수 있는 건, 의사라는 지위 때문 아닙니까? 무례가 될 지 모르는 질문을 억지로 삼켰다.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백기의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듯 석율이 덧붙였다.



백기 씨가 자기혐오를 느끼는 이유는 결국 자기의 정체성을 이해하거나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그럼 10년 가까이 이성애자로 살다가 갑자기 남자를 좋아하게 된 자기 자신을 이해해야 합니까?”



말은 쉽군요. 백기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석율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말을 이었다.



“흔하지는 않지만, 그런 경우도 간혹 있어요. 이전 연애에서 설렘이나 끌림보다는 안정감을 쫓았다면 더더욱 그럴 가능성이 높고요.”

“그래서 한석율 씨는 게이로서 나한테 인정하기를 강요하는 겁니까? 의사로서 지시하는 겁니까?” 

인간으로서도 전문의로서도 그 편을 ‘권유’합니다. 오해하지 말아요. 자기의 성 정체성을 인정하는 것과 커밍아웃은 다릅니다. 자기에게 솔직하더라도 사회적으로는 숨기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훨씬 많죠. 세상은 험하니까. 대신 내적 갈등은 많이 줄어들어요.”
“그런다고 나아집니까?”

“성적소수자들 중에는 자기가 동성에게 욕망을 느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해서 때문에 끝까지 자신을 속이고 사는 경우도 있어요. 근데 그건 너무하잖아. 안 그래도 게이혐오증이 만연한 사회에서 장백기 씨처럼 자기애가 강한 사람이 자기까지 완벽하게 속이고 살아갈 자신, 있어요?”



난 아니라고 보는데. 끝까지 정곡을 찌르는 말에 한참 대답을 미루며 눈동자를 떨던 백기가 결국 젠장, 작게 욕을 읖조렸다. 이렇게 적나라하게 까발려지는 건 입사 후 해준과 언성을 높이던 그 사건 이후로는 기억에 없었다. 애초에 정신과에 오는 게 아니었나 싶었다.



“난 내 환자가 덜 아프길 바랍니다. 장백기 씨도 이제 그 범주에 들었고요.”

“….”

“첫 방문이 마지막 방문이 되는 경우는 꽤 흔합니다. 기껏 변화하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하긴 억울하지 않아요?

“….”

“장백기 씨가 마음을 열기 전까지 약 처방은 안 할 겁니다. 당신은 나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 앞에도 장벽을 치고 있으니까요. 다음 진료 때는- 아- 물론 백기 씨가 오고 싶다는 가정 하에, 그 벽이 좀 치워진 상태에서 뵐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그럼- 그 말을 끝으로 처음의 예의 그 미소를 보인 석율은 아쉬운 기색 없이 모니터로 눈길을 돌렸다. 독심술을 당한 듯한 기분에 당황한 백기는 핏기없는 얼굴로 진료실을 나와 진료비를 지불했다. 회사로 돌아와서야 정신이 들었다.


벽? 뭐 이런 미친. 지가 의사면 다야? 동성애는 정신병이 아니니 자길 인정하면 살기가 편하다고? 1인 임상으로 논문을 낸 것도 아니면서 자기가 괜찮으면 모든 동성애자가 평화로운 건가? 


한없이 다정하게 다가왔다가 뒤로 물러나 백기에게 선택권을 넘겨버린 게이 닥터. 이상한 신경정신과 전문의 한석율을 향한 욕에 비례해 그의 단호한 말들은 시간이 지날 수록 안정감으로 변해 백기의 마음 한 구석에 차곡차곡 자리를 찾아갔다.






벽 II 끝.





Comments: 이 사진을 발단으로 원작 설정과 다르게 갑니다. (한석율/33세/정신과 전문의, 섬유팀 모른다...)


글을 처음 구상할 때 든 생각:

0. 해☜백☜율 (해준백기~석율백기 삼각관계 존좋bb)

1. 사람 맘 귀신 같이 읽는 영민한 닥터 한석율

2. 어른 남자 강 대리, 애한테 휘둘리는 강해준

3. 어른인 척 하지만 현실은 치기 어린 장백기


의식의 흐름대로 흘러가는 글이라 읽기 힘드실텐데 지난 편의 사랑스러운 피드백 감사합니다. #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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