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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 해준백기석율 (해준백기~석율백기) 트리플.

PC 혹은 Soundcloud 지원 환경에서 BGM과 감상하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철벽(디나이얼)과 개벽(오픈사이의 어떤 장벽(클로짓)에 대하여.

─ 






                  벽, (III)      






 




아, 백기 씨! 눈썹을 찡긋거리며 반가움을 표하는 석율이 잠시 기다려달라는 듯 진료실 의자를 가리켰다. 오늘은 짙은 파랑에 흰 도트가 들어간 셔츠에 감색 코듀로이 팬츠, 글리터 슬립온, 그새 컬이 짙어진 헤어까지. 석율은 온몸으로 패션에 대한 관심을 표출했다.



“눈이 빨갛네. 어제 막 알코올 들이붓고 고쳐달라고 병원 온 건 아니지? 잠은 좀 잤어?”

“잤습니다.”

“흐음- 잘 잔 사람의 얼굴이 아닌데?”

“강 대리님과…잤습니다.”



예상치 못한 말에 시종일관 웃음을 띄우던 석율이 웃음기를 거둔 얼굴로 시선을 고정한다. 처음 보는 석율의 모습에 당황한 백기가 어색하게 큼, 목을 가다듬었다. 석율이 이런 일로 자신에 대한 가치판단을 내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그의 행동이 위태로운 감정을 짐작케했다.



“제가 먼저 덤볐어요. 같이 자자고.”

“왜?”

“선생님이 그러셨잖아요. 이 관계의 주도권은 전적으로 저한테 있는 거라고. 끝내려고 했어요. 그런 식으로 다가가면 확실하게 거절을 당할 거라는 믿음이 강했기 때문이죠. 대리님이 호모포비아라면- 아니, 굳이 거기까지 가지 않아도 마음이 없는 사람한테 성적인 접근을 허락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꿈속에서처럼 저를 괴물보듯 하는 대리님의 모습이 어렵지 않게 그려졌어요. 어떻게 끝나도 이 이상으로 나쁠 수 없다는 치기가 행동으로 옮겨진 거라고 생각해요.”

“결과는?”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그 사람은 눈을 감았고, 저는 애정을 갈구했으니까. 그 사람의 흔적이 사라진 자리엔 ‘실수했습니다’라는 글귀가 남았어요. 끝까지 내가 강해준의 ‘실수’ 같은 거라면…”



자조적으로 이야기를 이어가던 백기가 말을 맺지 못하고 잠시 고개를 돌렸다. 눈물을 참으려 애쓰는 백기를 보며 석율은 속이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얼굴도 본 적 없지만 백기가 이럴 때마다 석율은 강해준이라는 남자를 사정없이 두드려패고 싶은 기분이었다. 


흐트러진 목소리를 가다듬은 백기가 한층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결연한 눈동자였다.



“관련된 모든 걸 끝낼 겁니다. 도와주세요”






▼ ▼ 

‘장백기는 이번 주에 못 나올 것 같네. 강 대리가 수고 좀 해야겠어.’


출근하자마자 인사총무팀으로 호출된 차 과장이 백기의 소식을 전했다. 사전 언질도 없이 한 주 내내 휴가를 낸 백기나, 웬만해서는 받아들여지는 일이 없는 5일 연속 휴가 승인에 예외가 생긴 것을 두고 15층에는 수많은 말들이 오갔다. 동료들의 전화나 연락에도 문자 한 통 없는 백기의 태도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회식 당일 사고를 당한 게 아니냐부터 시작해 여자친구와 해외여행에 간 거다로 이어지던 말은 사수에게 새파랗게 대들던 싸가지 없는 장백기에 대한 회상으로 이어졌고, 그 뒤로는 자연스레 이직 얘기가 튀어나왔다. 신나게 타인의 이야기를 꺼내던 이들은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는 해준을 보고는 슬쩍 그를 우려하는 말로 마무리하며 민망함을 감추려했다.



“저는 장백기 씨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묻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 이상 말을 건네지 못하게 만드는 해준의 대답에 인파는 제자리로 사라진다. 해준의 괜찮다는 말은 자신에게 하는 다짐과 같았다. 그는 괜찮은 상사로서 직속후배에게 안부조차 묻지 못하고 있었다. 백기가 괜찮지 않다고 대답한다면… 자신에게 책임을 묻는다면… 자신을 지속적으로 도발한다면… 혹은 이대로 사라진다면… 정말 괜찮을까. 해준은 백기의 공백이 두려웠다. 먼저 연락하지 않았을 때 응답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스스로에게 답을 내지 못하는 자신이 이토록 무력하게 느껴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떤 종류든 ‘마지막’이길 기대한 것은 자신인데, 그날 이후 출근길에 나설 때면 ‘정상적인 삶’에 대한 강박감이 내려앉았고, 수트는 무겁고 차가운 크롬 재질의 갑옷이 되어 목을 조여왔다. 무엇이 들었는지 짐작조차하기 두려운 장백기와 자신 사이의 감정과 관계를 끊어낸다면 자신은 언제든 사무적인 수직 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잘못된 방향으로 뻗는 가지를 잘라내듯 기울어진 부분을 절단하면 원상태로 돌아갈 것이라고. 하성준과 안영이가 그러하듯, 일정한 선 이상의 악감정도 호감도 없는 선후배 사이. 가끔 옥상에서 상사 욕을 하며, 술자리에서는 축배를 들고, 주어진 몫의 실적을 맡아 함께 수행하는 팀원이 되리라고. 그러나 새벽의 동침으로 어질러진 마음을 일주일 내내 정돈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자신을 마주했을 때, 해준은 절망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수렁에 빠진 기분이었다. 밀어낼 수 없는 감정들이 켜켜이 층을 올려 벽을 흔들고 있었다.





▼ ▼ ▼ 

헤드헌터에게 소개받은 외국계 회사의 면접을 보고 나온 백기가 카페에 들러 오랜만에 여유를 즐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폰이 잘게 진동했다. 벌써 합격 연락이 올리는 없는데…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늦지 않게 전화를 받았다.


[어때? 맘에 들어? 잘 될 것 같아요?]

“선생님이 제 헤드헌터입니까?”


어허- 사적으로 연락했을 땐 한석율 씨라고 불러줘. 전화를 받자마자 들리는 목소리에 긴장이 탁 풀렸다. 뒤이어 요란한 석율의 웃음소리와 함께 나 직종 전환할까? 하는 실없는 말이 휴대폰을 넘어왔다. 


[백기 씨, 다음 주 화요일 저녁에 시간 괜찮아?]

“회사 갑니다.”

[알아. 오래 있지 않을 거잖아. 외로운 닥터랑 밥 좀 먹어주면 안 돼?]



백기가 요새 피하지 않는 연락은 헤드헌터와 석율로부터 온 것 뿐이었다. 덕분에 각종 메신저와 통화목록에는 석율의 이름이 줄을 서 있었다. 백기가 해준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첫 단계로 모든 연락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을 때 석율이 기겁을 했던 탓이다.


‘설마… 백기 씨. 사회생활 안 할 사람처럼 그런다. 그럼 외로워서 죽어.’

‘의사라는 사람이 표현이 그게 뭡니까? 겨우 일주일 입니다.’

‘위험한 건 마찬가지라니까? 그런 식으로 벽 치다 애정과 관심에 목말라서 우리 병원에 찾아오는 사람이 줄을 섰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백기가 다른 방안을 고민하는 사이 폰 줘봐- 하던 석율은 재빨리 자신의 번호를 입력했다. 나 다른 환자들한테는 번호 줘 본 적 없는데. 어쩐지 신이 난 얼굴로 셀카까지 찍어 전화번호부에 저장하고 나서야 돌려준다. 저장명은 ‘외로운 석율쌤’


딴 건 몰라도 내 전화는 꼭 받아, 하며 해사하게 웃는 그를 차마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 환자와 의사가 공유하는 것과는 다른 기대감이 서려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먼저 손을 내민 것도 자신이었고, 지금은 석율이 필요했다. 보답의 차원이기도 했다. 



모진 진단과 설전으로 인한 치욕을 무릅쓰고 그 병원을 다시 찾았을 때도 석율은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그럼 지금부터 상처 봉합해요. 준비된 거 맞죠? 하며 자상하게 자신을 맞아주는 석율 앞에 백기는 빠른 속도로 장벽을 해체시켰다.


‘어떤 날은 그 사람이 만들어낸 숨소리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했어요. 거의 매일, 이러다 죽겠다 싶을 정도로 정신을 못차리고 있다가 출근하면 그토록 보고 싶은 얼굴이 굳어있는데, 겨우 진통이 멎는 것 같았어요.’

‘…’

‘그러다가 어느 순간 깨달은 거죠. 내가 겪고 있는 이 불안감, 두려움, 긴장감, 고통 같은 게 욕망이라는 걸요.’

‘예를 들면?’

‘사랑하거나 사랑해주기를 바라는 욕망이요.’


백기가 입을 열 때면 석율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부담스러우리라고 짐작했던 것과는 달리 무서운 집중력과 반박의 여지가 없는 진단, 상흔을 아물게 하는 다감함이 고마웠다.


‘백기 씨는 지금 강 대리라는 남자한테 느끼는 모순된 감정 때문에 힘들어하는 거에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그 사람한테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간절하지만, 강 대리가 그런 자기를 알아챌 거란 사실을 자각하면 차라리 지독한 미움을 받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우린 그걸 양가감정이라고 해요. 백기 씨의 경우는 전자의 욕구를 억누르면서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인 반응이 오는 거고.’

‘그런 것 같네요.’

‘백기 씨, 그러지 마. 당신, 충분히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야.’


그런 말들이 백기를 강하게 만들었다. 매일 아침 괴롭히던 두통과 무겁게 얹혔던 죄책감과 구토감이 서서히 무게를 잃었다. 해준은 여전히 간헐적으로 백기를 흔들었지만, 자신이 흔들린다는 것을 자각한 이후로는 석율과의 면담이나 소량의 약만로도 버티는 것이 가능했다. 스스로의 변화에 문득 백기가 짝사랑에도 면역력이 생기나보더라고 말하자 석율이 쓸쓸하게 웃었다. 



그런가봐.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무섭도록 익숙해지는 게 짝사랑이지.






▼ ▼ ▼ ▼ 

해준 씨, 회사에서 무슨 일 있어? 출근 준비를 하는 해준을 보며 지호가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아니, 짧은 대답에 해준의 뒷모습만 보던 지호가 여전히 우려하는 눈으로 해준을 바라본다.


자기, 신년 승진이 부담 돼? 웬만하면 모른 척 하려고 했는데 그 회식 이후로 쭉 이상해. 내가 아는 강해준 아닌 다른 사람 같아. 주말 내내 쉬지도 않고…. 무슨 일이야?  


마음 같아서는 지호에게 모든 걸 털어놓고 싶었다. 나,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거면 어쩌지? 해준의 불안감을 읽은 지호가 먼저 해준의 목덜미를 껴 안았다. 별 일 없을거지? 그 말에 해준은 머릿속 생각을 지우고 평소처럼 지호의 이마에 입맞췄다. 오늘도 가족이라는 책임감이 더해진 검은 색의 갑옷을 입고 출근길에 나선다.



아침 7시 30분.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은 해준은 극심한 피로감을 느꼈다. 이번 주에도 어쩌면, 백기의 텅빈 책상만 바라보고 있을 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유리문을 들어섰을 때, 자리에 앉아 있는 장백기가 보였다.


백기의 복귀는 해준의 예상을 뛰어넘는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일주일 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백기는 승진축하 회식 전의 모습과 다를 게 없이 단정한 차림으로 웃었고, 해준을 발견하고는 눈인사를 건넸다. 왜 연락이 없었냐는 동료들의 물음에는 정신이 없었다며 미안한 얼굴을 했다. 업무시작 전까지 백기에게 몰린 인파가 마 부장의 등장으로 흩어지며 소란이 가라앉았다. 


백기가 돌아오고, 해준은 여전히 방향을 찾지 못한 월요일이 지나가고 있었다. 퇴근하는 백기에게 더 이상 ‘내일 봅시다’라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고 백기도 해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인사를 마친 후 자리를 빠져나갔다.



회사 밖을 나오던 백기는 혹여나 저를 못알아볼 세라 손을 크게 흔드는 석율의 모습에 웃음이 났다. 



“백기 씨!!! 여기!!!”



흡사 해외 스타를 마중하러 온 소녀팬 같았다. 해준과 동갑인 이 남자는 진료실 밖에서는 그저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아이 같았다. 게다가 백기가 회사로 복귀한 이후 전보다 훨씬 더 많은 연락을 해왔다. 할 일도 없냐고 타박을 주면 ‘우리 백기 씨가 걱정되서 그렇지.’ 하는 목소리에 염려와 그리움이 묻어나 코 끝이 찡해졌다.



“오래 기다렸습니까?”

“아냐. 방금 왔어. 역시 내 게이다는 최고급이야. 장백기 엘리트였구나?”

“배고픕니다.”

“백기 씨 회복 기념으로 내가 쏠게. 프렌치 레스토랑 괜찮지?”



자주 가는 덴데 맘에 들었음 좋겠다, 우연인지 백기의 취향을 귀신같이 파악한 석율이 그저 신기했다. 백기를 조용한 룸으로 안내한 석율이 능숙하게 주문을 했다. 테이블 한 가득 코스 요리가 채워지는 와중에도 석율은 접시 수 보다 많은 질문을 백기에게 쏟아냈다.



“백기 씨는 어쩌다 종합상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거야? 변호사 같은 거 하면 잘했을 것 같은데.” 

“외국어를 전공했고, 고등학교 때부터 무역 분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학교랑 전공은?” 

“서울대 독문과.” 

“어, 그럼 동문이네? 왜 얘기 안 했어?”

“굳이 얘기할 필요성을 못 느꼈네요.” 

“독일어 하는 백기 씨 보고 싶다. 섹시할 것 같아.” 



쿨럭, 눈을 빛내며 웃는 석율의 마지막 말에 당황한 백기가 포크를 내려놓고 기침을 하며 물을 한 모금 삼켰다. 한쪽으로만 쏟아지는 질문이 취조 같아 부담스러웠던 백기가 석율에게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한석율 씨는 왜 정신과 의사가 됐습니까?”

“난 열다섯에 정신과 의사가 되기로 결정했어. 내가 나를 이해할 수 없었거든. 보통 게이들은 사춘기 무렵에 본인의 성적지향에 대한 자각이 생겨. 다른 놈들은 청순한 옆집 여대생, 섹시 컨셉의 여가수나 새로 부임한 예쁜 영어선생이 꿈에 나와서 바지를 적시는 동안 나는 왜 남자인 과외 형이 나왔던 걸까,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남들과 다른 자신에 대한 내적 갈등이 생기지.”

“난 내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빠르게 받아들이는 편이어서 그런 갈등은 성장통으로 여길만큼 괜찮았어. 문제는 타인이나 사회의 시선이지. 내가 좋아하는 남자 얘길 꺼내면 비정상 취급 받는 걸 이해할 수가 없었던 거야. 내가 정말 다른 건가? 나나 동성애자들은 정신구조가 특이해서 그런 건가? 그런 생각에 몰두하게 되면서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진로를 선택했던 거야. 의대 시절에도 연구하고 싶던 분야는 한결 같았고. 그래서 내 진료실엔 늘 성적소수자들이 줄을 서 있어.”



식사를 끝내고 굳이 백기를 집까지 데려다주겠다는 석율의 고집에 못 이겨 좁은 골목길에 어울리지 않는 세단이 들어섰다. 차에서 나와 오피스텔 입구로 들어가려던 백기가 다시 석율에게 돌아와 차창을 두드렸다. 창문을 내리자 코가 빨개진 얼굴이 빼꼼 자신을 바라보았다. 한석율 씨, 부르곤 숨을 고르는 그 모습이 못 견디게 사랑스러워 석율은 레스토랑에서부터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백기를 알면서도 끈기있게 기다렸다. 



“…고맙습니다. 한 번도 말씀 못드린 것 같아서요. ”



의외의 말에 잠시 멍해진 석율이 백기를 불러세웠다. 곧 차에서 내려 백기를 한 번 안은 채 석율이 말을 꺼냈다.



“백기 씨, 좋아해.”



백기는 무어라 대답을 해야 좋을 지 몰라 미동도 없이 듣고만 있었다. 애정을 담은 눈길이 해준을 바라보는 자신의 눈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짐작하던 감정을 당사자에게 말로 듣는 것은 사뭇 다른 기분이었다. 



“어떤 날은 장백기가 만들어낸 숨소리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했어. 거의 매일, 이러다 죽겠다 싶을 정도로 정신을 못차리고 있다가 다시 그토록 보고 싶은 얼굴이 울상 짓고 있는데, 난 겨우 진통이 멎는 것 같은 거야.”



그 사람이 내 앞에서 다른 놈 얘기하며 울고 불고 할 때는 귀를 틀어막고 싶기도 했어. 언젠가 자신이 한 말을 똑같이 하고 있는 석율을 보며 백기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채로 서 있었다. 먹먹한 연심(戀心)이 가슴을 타고 들어와 간지럽혔다.



“잘 해줄게.”



지금 당장 답해달라는 거 아니니까 부담갖지 말고, 준비되면 얘기해 줘. 굿나잇! 쓸쓸히 돌아서는 석율의 모습이 오래토록 백기의 눈에 밟혔다.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무섭도록 익숙해지는 게 짝사랑이지. 언젠가 그가 했던 말과 함께.






▼ ▼ ▼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금요일이 다가오도록 사무적인 대화만이 둘 사이를 오갔다. 이런 관계가 되길 원한 것은 자신인데,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도 해준 자신 뿐인 것 같았다. 기계적으로 기획안을 작성하기 위해 키보드를 두드리거나 수익률 분석을 위해 마우스를 딸깍거리면서도 신경은 백기의 움직임에 집중하고 있던 터였다.


백기의 휴대폰이 이전보다 자주 액정을 깜빡였다.


[외로운 석율쌤: 방금 면담 끝낸 여고생, 백기 씨 닮았어. 피부 뽀얗고 안경 쓴 범생인데 웃을 때 진짜 귀엽다?]

[장백기: 환자 정보를 그렇게 누설해도 됩니까?]

[외로운 석율쌤: 비밀! 백기 씨 생각나서 특별히 잘해줬는데 날 부담스러워 해 ㅠ_ㅠ]


그때마다 백기는 휴대폰 액정을 보며 웃었고, 신입사원으로 처음 들어오던 때처럼 싱그럽게 빛났다. 누군가 알아주기를 원하던 어린 아이 같던 모습은 희미해지고 어른스러운 여유로움이 묻어났다. 그것이 장백기가 제게서 탐내하던 것이라는 걸, 해준은 모르지 않았다. 그는 다 잊은 것일까? 오랫동안 알고 싶어하지 않은 백기의 깊이를 짐작하는 자신이 우스워 해준은 평소 잘 찾지 않는 옥상에서 한참 숨을 고르기도 했다.



“강 대리님.”



백기의 말투에서 해준은 미묘한 이질감을 감지했다. 조심스럽던 망설임과 떨림이 씻겨나간 부름이 금방이라도 자신을 미치게 할 것 같았다. 뒤늦게 고개를 들자 백기가 쥐고 있던 흰 봉투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승인 부탁드립니다.”



辭職書. 해준이 빳빳한 봉투의 글자를 더듬었다.



“지난 주부터 인사팀에는 말씀드렸습니다. 부장님과도 면담 끝났습니다. 승인하신 후 인사팀에 전달부탁드립니다. 인수인계 자료는 오늘 내 전달해드리겠습니다.” 

“3년차에 이직은 장백기 씨 커리어에 좋지 않을 겁니다.” 



가지 말라고, 해준은 그저 매달리고 싶었다. 그러나 입에서 만들어낸 음성은 그의 커리어를 염려하는 우스운 문장이었다. 백기가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한숨을 쉬었다. 버릇없이 굴던 신입사원 장백기가 자신의 후배 훈육 방식을 지적했을 때 해준이 보였던 반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의 인간성에 대한 비소라는 것을 알아챈 해준의 심장이 덜컹거렸다. 



“제 인생을 위해 결정한 일입니다.”

“나는 백기 씨가 잘 해오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일 때문입니까? 그렇다면 부서 이동을 요청하겠습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대리님.”



대안을 제시하기가 무섭게 거절의 말이 돌아왔고 백기는 등을 돌렸다. 괜찮다는 말은 자신이 아니라 백기에게서 먼저 나왔다. 타이핑을 하는 것도 잊고 한참이나 파티션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음에도 인수인계서를 작성하는 백기의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최악이었다.





장백기는 그날 더 부를 핑계도 없을만큼 철저한 인수인계 자료를 내놓았고, 곧 부서마다 찾아다니며 안녕을 고했다. 서운함과 애정이 섞인 소리들이 백기를 향했다. 송별회라도 한 번 해야지, 하는 차 과장의 제안도 백기는 깨끗하게 거절했다. 연말이라 안 그래도 술자리가 많을 테니 이직한 회사에서 자리잡은 후 연락을 주겠노라고 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자리를 정리하며 안영이와 웃는 백기의 모습이 낯설었다. 오전 11시 정각을 가리키자 박스를 든 백기가 모두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안녕히 계십시오. 모두 감사했습니다.


깔끔한 인사 뒤로 발자국 소리가 울렸다. 해준이 귀에 꽂혀있던 헤드폰을 책상에 내려놓고 뒤따라나갔다. 의아하게 바라보는 팀원들의 시선이 꽂혔다. 그런 것 따위는 신경쓸 새도 없이, 눈 앞에서 점차 좁아지는 엘리베이터 문에 해준이 급하게 버튼을 눌러 문을 열었다. 유일하게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던 백기의 눈이 자신을 마주했다. 아무 것도 담기지 않은 그 시선에 해준이 멈칫했다. 백기의 옆에 나란히 선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해준을 두고 백기가 먼저 초조한 긴장감을 깨뜨렸다.



“많이 좋아했어요, 짐작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같은 마음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

“아내 분과 행복하세요.”



타이밍 좋게 문이 열렸고 백기가 저 밖을 향해 멀어졌다. 해준은 끝내 가지 말라는 말을 꺼내지 못한 채, 백기의 말만을 되뇌며 못 박힌 채 서 있었다. 

끝이었다.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나 인적이 느껴지지 않는 어둠 속에서 해준은 백기가 놓아둔 사직서를 조심스레 펴보았다. 이제 제가 할 일은 서명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펼쳐진 종이에는 입사일자나 퇴사일자, 소속과 직급 따위가 나란히 적혀있었고, 하단 서명란 위에 퇴사사유가 적혀있었다.


[새로운 분야에 대한 도전과…


글자를 따라가던 해준의 시선이 불안정해진다.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나열에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문장을 읽은 해준이 이내 손을 뻗어 수정테이프를 찾았다. 


……사랑.]


3년 전, 처음 만났던 때에도 항상 사직서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자기애(自己愛)가 각별하던 신입사원의 눈에 지금보다 날카로운 감정이 자신을 향해 도사리고 있었던 시절부터 각오한 바였다. 사수와의 불화나 적성의 불일치 따위가 적혀 있는 사직서. 그러나, 이건 언제부터 예견했어야 하는 걸까. 


사랑.



그 마지막 단어에 끝없이 아득해진다. 이어지는 장백기에 대한 기억들과 자신이 느꼈던 감정. 열정이 밀려오는 관계를 끊임없이 밀어내고 부정했던 자신과 달리 백기는 그것을 사랑이라 칭했다. 어리석고 용감한 나의…….


차마 백기를 지칭할 단어를 찾지 못한 해준의 손에 땀이 베어 수정테이프가 미끄러졌다. 이내 손수건을 찾아 의식을 행하듯 찬찬히 손을 닦은 후, 꺼내어본 적이 없는 단어를 수정테이프로 지우고 복사기를 작동했다. 그리하여 해준은 사랑의 흔적이 지워진 결과물을 들고 파쇄기로 향한다. 우웅- 시끄러운 소리가 탕비실을 울리는 가운데 끝내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거두었다. 수정테이프 자국이 남은 원본을 양복 안주머니에 넣고서야 탕비실의 소음이 멎었다. 자신이 파쇄하려던 무형의 감정을 거두어간 이의 얼굴만이 머릿속에 선연했다.


쾅! 아무도 없는 늦은 밤, 15층 탕비실 벽에 파열음이 울렸다. 이어 해준이 무너지며 흐느끼는 소리가 서서히 공간을 가득 메웠다. 이날 이후, 해준이 지나간 자리에는 때때로 사랑을 잃은 서글픔이 파쇄기의 소음을 대신했다.






▼ ▼ ▼ ▼ ▼ 

오셨어요? 접수원이 백기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한 선생님 안에 계시죠? 하는 물음에 저- 이제 진료 마감시간이라서요, 하며 미안해하기에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오늘은 진료 받으러 온 거 아니니까. 선생님한테 손님 오셨다고만 전해줄래요?


막 퇴근하려던 참이었다. 오늘 퇴사한다던 장백기가 마음에 걸려 석율은 하루가 유독 길다고 생각했다. 고백을 하고 상대의 대답을 기다리면서 얼굴을 보겠다는 건 자신의 욕심이라 판단해 몇 번이나 백기에게 전화를 걸려다 포기했다. 


선생님, 손님 오셨는데요- 하는 접수원의 목소리에 괜한 짜증이 비죽 올라오던 참이었다. 

들어오시라고 해요, 하고 옷 매무새를 정돈하던 석율의 움직임이 문 안으로 들어온 이와 눈이 마주치며 정지했다. 보고 싶던 얼굴.



“백기 씨…?”

“나는 오래 기다리는 게 어떤 건지, 얼마나 힘든지 알아서.”

“…”

“이번엔 그렇게 만들지 않으려고요.”



매번 통화할 때마다 내가 못 듣는 줄 알고 소리죽여 사랑하는 백기 씨, 하고 부르는 바보를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어요.



“좋아해요.”



이씨, 좋은데… 행복해서 날아갈 것 같은데 왜 자꾸 눈물날 것 같지? 석율의 그렁그렁해진 눈을 보며 백기가 환하게 웃었다. 매번 내가 울었는데 이젠 내가 닦아줄 차례네요.



“잘 해줄게.” 

“응. 그만 외로워해요, 우리.” 



맞닿은 백기의 입술에 온기가 돌았다. 그만 아프자, 입을 뗀 석율이 백기의 귓가에 속삭였다. 

돌고 돌아 그토록 헤맨 끝에 찾은 사랑이었다.






벽 III 끝

벽 Trilogy Fin.







Comments: 이 기빨리는 삼각관계를 끝까지 함께 해주신 분들께 감사인사부터 드려요ㅠㅠ


사실 제가 쓰면서도 감정선이나 시점을 따라가는 게 쉽지 않았던 지라, 

읽으시는 분들이 더 고생하셨을 거라는 생각이 여러 번 들었습니다. 

그래서 정성껏 피드백 주시는 분들이 더더욱 감사했고요()


모든 글의 결말을 내는 게 쉽지 않지만, 삼각관계는 특히 그렇습니다.

다시 한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석율백기 햄볶해라. #해준백기는 다른 글에서 봅시다. #그래도 세계는 삼각형이다 #해백율 만쉐!


+ 20150208 : 음원 문제로 BGM이 바뀌었습니다. 

(1차 BGM: Zero 7 - In the Waiting Line)

(2차 BGM: Ellie Goulding - Lights / Shook Remix)

+20150427: 2차 음원 문제로 BGM을 Zero 7 Remix 버전으로 바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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